반둥회의에서 환영받은 일본~참가자 카세 슌이치는 대동아공동선언을 작성한 인물
2024-08-24 카테고리:대동아전쟁
아시아·아프리카 회의
1955년, 29개국이 참가한,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출석한, 카세 슌이치 외상 참가는, 당시의 각국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아시아 각국도 잘 왔다 일본 덕분이라며 환영을 받았다. "아시아 민족을 위한 일본의 용전과 그 의의를 내세운 대동아 공동선언은 역사에 빛난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대표단 단장인 고碕 다쓰노스케 경제심의청 장관 등 일행은 갓 독립한 아시아, 아프리카 신흥국 대표들의 환영을 받으며 잇따라 따뜻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일본은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점령이 끝나고 국제사회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의 일본에 있어서, 불안을 안고 참가했습니다. 정부 내에는 보류론도 있었을 정도였지만, 예상과 반대로 반가운 환영을 받은 것입니다. 카세 슌이치 대표 대리는,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 고碕대표와 동행했습니다.
일본을 환영한 각국
각국 대표의 말을 인용해 일본이 대동아 선언이라는 것을 내놓고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전쟁 목적으로 한, 그 선언이 없었다면, 혹은 일본이 아시아를 위해 희생하고 싸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영국의 식민지, 네덜란드의 식민지, 프랑스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일본이 큰 희생을 치르고 아시아 민족을 위해 용전해 주었기 때문에 오늘의 아시아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듬해 일본은 맑게 유엔에 가입했고, 가세는 초대 유엔 대사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카세는 아시아아프리카그룹이 시종일관 열심히 일본의 가입을 지지한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아시아·아프리카 제국으로부터 큰 신뢰와 기대를 받아 전후 우리나라는 오늘의 번영을 쌓아 온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자막 있음
대동아 공동선언을 작성한 인물
카세 슌이치는 시게미쓰 외무상의 비서관으로, 1943년 아시아 각국 대표를 초청해 개최된 대동아회의에 참가하고, 그 핵심이 되는 대동아 공동선언의 원안을 쓴 외교관입니다. 카세는, 저서, ( 「그때 「쇼와」가 바뀐 101세, 최후의 증언」)에서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그 항복 조인식 날에 그런 말을 서로 하지 않은 것은 세계사적인 싸움이 끝나고 일본은 인류사에 의해 주어진 역할을 다했다는 긍지가 가슴속에 있었다. 진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결코 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오기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후 이 대동아 공동선언을 오로지 군부가 점령지역을 착취하는 연막에 이용한 것처럼 해석하기 쉽지만 진의는 일본의 전쟁 목적을 천명하는 데 있었다.
어쨌든 일본의 앞선 전쟁 때문에 독립한 아시아 국가들은 오늘날에도 대동아 공동선언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아시아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여러 민족까지 일본이 제창한 식민지 해방운동에 진심으로 감사했던 일은 내가 1955년(쇼와 30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일본 정부 대표로 참석했을 때나 초대 유엔대사로 유엔에 있을 때에 친근하게 감득했다.
대동아 공동선언이 일본에서 경시되고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자, 어떻습니까? 대동아회의 사진만 봐도 기분 나쁘다고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얼마나 역사를 배우지 못했음을 알 수 있을까요? 이러한 사람들은 서구의 시선이나 중국, 반도의 시선에서만 역사를 배우고 있어 일본에 있어서의 전쟁, 아시아에 있어서의 전쟁이라는 시점이 점점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 채택된 선언을 소개하겠습니다.
- 기본적 인권과 유엔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존중
- 모든 국가의 주권과 영토보전을 존중
- 모든 인류의 평등과 대소 모든 국가의 평등을 승인하는
-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 유엔헌장에 의한 단독 또는 집단적인 자국방위권을 존중
- 집단적 방위를 강대국의 특정한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지 아니한다. 또 다른 나라에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
- 침략 또는 침략의 위협·무력 행사에 의해서, 타국의 영토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을 두지 않는다.
- 국제분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 해결
- 상호간의 이익과 협력을 촉진하는
- 정의와 국제의무를 존중
식민지화되어 가는 역사
아프리카 각국은 1400년대 중반부터 아메리카 대륙과의 노예 무역이 이루어졌습니다. 1800년대 초부터 서양으로부터의 분할로 식민지화됩니다.
아시아 각국은 그보다 일찍 1500년대 초부터 식민지화가 시작되었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등은 400년 이상 식민지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일본을 둘러싼 환경은 아시아 각국이 차례로 식민지화되면서 드디어 일본과 코앞인 한반도와 중국으로 서양의 손이 뻗어가던 가운데 아시아를 식민지화하던 서양 열강을 구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벌어진 것이 대동아전쟁이었습니다. 이 수백 년의 서양 지배 속에 있던 동남아시아에서 일본 통치 시대는 불과 2년에서 5년이지만, 이 기간에 동남아시아 각 지역은 국력을 갖추고 무기 사용법, 전투 방법, 국가 운영 방법 등을 일본으로부터 배웠으며, 일본이 패배한 후에 독립 전쟁을 차례로 치렀습니다.
독립해 가는 아시아·아프리카
그리고 일본이 철수한 후에 아시아 각국은 독립을 이루고,
1960년에는 아프리카 17개국이 일제히 독립을 달성했고, 1960년은 아프리카의 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유엔 총회는 그해 12월 14일 '식민지와 인민에게 독립을 부여하는 선언'을 채택합니다. 그리고 1964년 미국에서 공민권법이 제정되어 인종차별을 긍정하는 주법이 폐지됩니다. 그리고 1969년에는 유엔에서 인종차별철폐조약이 발효됩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처럼 얼마나 일본의 전후 교육이 편향되어 있는지 깨달을까요. 이러한 유색인종의 오랫동안 억압되고 지배되어 온 역사, 그리고 일본의 전쟁의 목적 등에 대해서는, 전후 일본 국내에서는 이야기되는 것도 없고, 국제사회에서는 이른바 마이너리티 리포트입니다. 그리고 국제사회 안에서 일반화되는 일은 없습니다.그러나 이것들은 많은 유색인종 국가의 목격자가 있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라고 해도, 이 반둥 회의에 참가한 아시아·아프리카 각국의 인구는, 당시 약 13억명이라고 해, 1955년 당시의 세계 인구가 27억명이라고 생각하면, 약 반수가 목격하고 있는 사실이며, 왜 이것이 일반화되지 않는가 하면, 개발도상국이며, 대수롭지 않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요.
이런 전제가 깔려 있어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참가한 일본은 대환영을 받은 셈입니다. 그들 나라들은 일본 덕분에 자신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는 결의가 생겼다고 입으로 말합니다. 이것도 잘못된 역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