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주의 종말 - 식민지는 최근까지 운영되고 있던 경제 정책, 인종차별 철폐는 그 후.
2021-08-12
카테고리: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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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의 종식
국제사회 최초로 식민주의가 국제적으로 부정된 것은 1960년 12월 14일 유엔 채택, 식민지와 인민에게 독립을 부여하는 선언(Declaration on the Granting of Independence to Colonial Countries and Peoples)에 따른 것이다.대동아전쟁을 비판했던 유엔이 종전 후 15년간 식민지 정책을 용인해 왔다.더욱이 이는 선언일 뿐 실제로는 1990~2000년을 식민주의 폐절의 10년으로 지정하고 있다.
식민주의의 종식은 경제적인 이유
식민주의의 폐절은 인도적 견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는 경제적으로 합리적이지 못한 형태가 된 것이 큰 요인이다.
세계 자본시장이 탄탄해져 한 나라를 통째로 통치하는 것보다 성장성이 높은 기업만 인수해 이익을 얻는 것이 좋다.성장이 멈추면 쉽게 철수할 수 있어 리스크가 적다.자본 투하를 해도 성장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도 이익이 증가하지 않는다.
인종차별철폐법안
일본은 1919년 국제연맹에 인종차별철폐법안을 제출한 바 있다.이는 국제사회에서 인종차별 자체를 철폐할 것을 요구한 최초의 제기다.그로부터 41년 후 국제사회는 앞으로 식민지 정책을 폐지해 나가자는 결의를 했다.
인종차별 철폐되지 않고
이는 식민지를 철폐하는 국제적 틀이지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것은 아니다.실제로는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합법화하는 짐 크로우법의 철폐는 1964년이 된다.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는 1994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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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태국 왕국은 식민 지배를 경험하지 않았다 - 이씨 조선과는 전혀 다른 국가 운영 - 조선은 태국처럼
한반도는 독립국이 될 수 있었을까
독립을 유지한 유색인종의 나라
완충지대로서의 지리조건을 이용
균형을 계속 깨부수던 이씨조선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맺어진 병합 조약
태국과 일본은 독립국가였다
일본이 오지 않으면 한반도는 독립한 채였다는 이치를 가끔 듣지만 너무 신기한 얘기다.당시의 세계를 둘러보면 착취하는 쪽과 착취당하는 쪽으로 색깔이 나뉘어져 가던 시절이었다.
백인이 유색인종을 지배한다는 것이다.아프리카 대륙이나 아시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일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아메리카 대륙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 세계 속에서 한반도만이 독립국가로 존속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
그 중 태국은 아시아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그 방법은 매우 절묘했다.당시 서양의 식민지 정책은 서로 유럽 간의 전쟁이 되지 않도록 거리를 두면서 침략을 해왔다 .
영국은 인도에서 미얀마,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제도, 프랑스는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동남부다.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깔아 아시아 북동부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다.
태국은 아시아 서부의 영국 세력과 동부의 프랑스 세력 사이에 낀 나라가 되어 완충지대로 살아남은 것이다 .
태국은 그 입지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영국 프랑스 측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완충지대로서 평등하게, 나아가 양국에 이익이 되는 중간외교를 능숙하게 펼쳤다.
태국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다면 당연하지만 어느 한 나라가 먼저 침공해 식민지가 됐을 것이다.완충지대로서의 메리트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이를 할 수 있었을까.고송도 민비도 일본에 가까워졌다면 청나라에 흐느끼고 눈을 뗀 틈을 타 러시아에 접근해 무려 고종은 러시아로 망명까지 가는 형국.청일전쟁의 트리거가 된 것은 바로 한반도인 .
러시아는 가오송을 거쳐 한반도의 이권을 속속 챙겼다.드디어 러시아에 잡아먹힐 것을 깨달은 결과 황급히 일본식민지파가 이기고 한일 병합 조약이 맺어지게 되었다.
일본에 위협을 받아 병합 조약을 맺었다고 하는데, 러시아로부터 위협을 받은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태국 외에 아시아에서 독립을 지킨 것은 일본뿐이다.일제 치하에 들어선 한반도와 대만은 결과적으로 서양의 식민지 정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만주국은 독립상태이긴 했지만 일본의 괴뢰국가라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한다.
어쨌든 그 시대에 유색인종이 독립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태국처럼 세계 정세를 제대로 이해하고 지정학적 조건을 교묘히 이용하는 희귀한 경우나 혹은 유색인종으로 일어나 백인과 싸운 일본의 경우다.호랑이 앞에서 자고만 있다면 먹을 수 있을 뿐이야.그런 시대겠지.
카슈미르 지역 인도군 증원 인도가 중국 국경 부근에 병사 5만 명 증원(전년 대비 140%).인도는 움직임이 빠르네.G7에 참가하고 바로 대응.
동남아시아에 있어서 일본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한국은 선택될 가능성이 가장 낮은 나라
일본과 한국의 동남아시아 파트너십 제공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2020년 조사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지역 정책 입안자들은 일본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안보 파트너로 간주했고, 한국은 나열된 7개의 선택지 중에서 선택될 가능성이 가장 낮은 나라였습니다.
한국의 외교정책은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그를 둘러싼 강대국 간의 정체된 분쟁 속에서 갇혀 있었습니다.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지만, 이 지역에 대한 한국의 관여는 주로 미국의 보조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의 역사적 영향은 훨씬 컸다.
일본은 직접적인 방위 협력을 실시할 수는 없지만 동남아시아 국가에 관여하기 위해 정곡을 찌른 지원을 이용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은 동남아시아 국가의 연안 경비대의 능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 왔습니다.일본 연안 경비대의 건설과 기술 지원 노력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해사 클레임을 집행하는 능력을 향상시킵니다.
한국도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지원하고 있지만 중국의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동남아의 전략적 이익에 대해 중국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한국의 시도는 안보 파트너로서의 한국에 대한 열의를 북돋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이지만 동남아시아 정책 입안자들이 한국과의 안보 파트너십에 부정적으로 기울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한 중심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은 특히 중국에 관해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민감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이 점에서 안전보장 파트너로서의 일본은 점점 영향력이 증가하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매우 구체적인 이익을 제공합니다.
일본은 일본 입장에서 오랜 역사상의 관계를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갈 뿐입니다.한국과는 신뢰가 다르다는 것을 동남아시아 자신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시아누크 전 국왕은 전후 히로히토 당시 천황을 격려 때문에 일본 방문하는 대일 전후 배상 청구권을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전 국왕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전 후 침체된 일본에 대해 쇼와 천황을 격려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첫 국왕이다.캄보디아 정부는 1954년에는 캄보디아 일본 공사관에 대해, 대일 전후 배상 청구권의 포기를 선언.폴 포트에 의한 동란이 발생해 독재자가 실권을 잡은 뒤 국제 원조로 달려간 것은 일본 자위대였다.
지뢰 제거, 도로 정비 등에서 자위대는 엄청난 성과를 올렸다.1963년 일본의 지원으로 일본 캄보디아 우호교가 건설됐다.지뢰, 불발탄, 폴 포트 잔당 게릴라에 의한 폭파 예고, 일본인 살해 예고가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인 기술자들이 우호교를 완성했다.폴 포트파들의 내전으로 봉쇄된 채로 있다가 1994년 2월 25일 재개통했다.
일본 캄보디아 우호교는 1,000 리엘 지폐 뒷면에 그려졌다.동남아시아에서 수돗물을 유일하게 마실 수 있는 곳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이다.기타큐슈시의 수도시설 원조로 실현되었다.현 국왕인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은 아버지 시아누크 전 국왕으로부터 별명으로 도쿄짱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대항해시대와 세계의 변모와 일본식민지를 경험한 아시아에서 지지받고 신뢰받는 일본
세계사는 대항해시대를 맞아 크게 변모했다.아시아는 차례차례 서양의 식민지로 여겨져 착취당하고 노예처럼 취급되었다.그러나 반면 식민지화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발전하여 적지 않은 생활이 향상되었다.
국내에서 백인과 원주민의 권리 차이가 역력한 가운데 생활은 전체적으로 향상된 측면이 있다.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왜 일본이 지지를 받고 있는가 하면 일제 강점기 일본은 아시아인을 노예화하지 않았다는 점과 근대 국가를 자신의 자국민의 힘으로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일체를 그 나라에 대해 교육한 것이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 철군 후 말레이시아로 돌아와 다시 식민지화를 시도한 영국은 일제강점기 이후 말레이시아가 과거 말레이시아가 아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전에는 무저항으로 식민지가 되어 간 아시아 국가들은 용맹과감하게 일어나 유럽 열강과 싸워 차례로 독립을 쟁취해 나갔다.
유럽의 식민지로 지목된 아시아 국가들은 유럽에 대해 사과 요구 등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일본에 대해서도 하지 않는다.이는 스스로가 전진하고 있다는 실감을 얻느냐의 차이이며 당사자 의식이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특수한 전후관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