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4일 올해 3차 미사일 시험발사 일본 EEZ 밖으로 착탄
2022-01-15
카테고리: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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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 실험을 멈추지 않는 북한
어제 북한이 올해 들어 세 번째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다.이번 탄도미사일은 400km가량 비상해 일본 EEZ 밖으로 착탄 한 것으로 알려졌다.올해 들어 빈번히 북한은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12일 부과된 미국의 제재에 대한 보복으로 풀이된다.애초 북한은 왜 미사일 실험을 멈추지 않는가.
북한에서는 5명 중 1명이 군인이라고 한다.김 왕조를 지키는 군대이다.김정은은 나라를 자위하기 위한 미사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독재정권하의 군대일 뿐이다.북한은 만성적인 식량난, 자원난이 계속되고 있다.국민이 굶어죽어도 미사일 개발에 많은 국비를 투입한다.미사일 개발 비용으로 몇 명의 국민이 구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이 모순을 깨닫기 쉽다.
군인은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다
5명 중 1명이라면 국민의 20%는 생산과 관련된 산업에 종사하지 않는다.군인은 전쟁이 없으면 훈련과 경비가 주된 일이 된다.즉 나머지 80%가 북한의 GDP를 지탱하는 노동력이 된다.그만큼 빈곤의 국민의 20%가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것이다.북한 병사 대부분이 영양실조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판문점에서 한국으로 탈출한 북한병은 등 뒤에서 북한병에게 여러 발의 총탄을 맞고 한국에서 수술을 했는데 장내에서는 대량의 기생충 가 발견됐다.
북한 경제는 이제 나라를 경영할 수준이 아니며 병사들은 작전행동을 할 만한 체력이 없다.그래서 비용이 싼 핵미사일 개발인 셈이다.병사를 아무리 길러도 육전 등을 치를 수 있는 성능은 이제 없기 때문이다.
POINT 이러한 이유로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핵미사일을 멈추고 군대가 나라를 지킨다는 선택지는 이제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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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북한에서 국민이 굶어죽는 현상 - 모든 것은 미사일 제조에 쓰인다.현존하는 이씨조선.
새든 곤충이든 스스로 식량을 얻어 생활한다.인간이 굶어죽는다면 신기한 일이다.동물에 비해 훨씬 효율적으로 식량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북한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국민이 번 것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미사일로 모습을 바꾸다.
김정은은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국민이 굶어죽는다면 그 돈을 국민의 식량 수급에 충당하면 된다.국민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김정은 일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이씨 조선시대에도 왜 국민의 절반이 노비였고 아사자가 줄을 잇지 않았을까.국민이 일궈 얻은 식량은 어디론가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한에서는 남자 10명 중 1명이 군인이라고 하니 놀랍다.전체 인구가 2,597만명 중 128만명이 군인으로 여겨진다.게다가 이건 노인이나 아이들은 제외되는 거니까 노동인구 중에서 봤을 때 더 비율은 높아진다.즉 그만큼의 남성이 사회의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경제적으로 왜곡된 사회형태를 북한의 미사일 개발이 해소하겠다는 것인가.군인 인건비보다 핵미사일이 훨씬 비용이 저렴할까.어쨌든 현대는 유엔 회원국은 내정간섭 아래 다른 나라를 공격할 수 없다.핵미사일을 배치할 경우 김 왕조는 반석이 된다.영원히 이어지는 이씨조선이다.
북한을 파탄낸 스포츠 축제 - 매스게임으로 친숙한 노동절 스타디움은 이때 건설되었다.
올림픽 개최 희망 북한
축제 개최를 둘러싸고 첫 부모와 자식 대립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북한을 파탄낸 스포츠 축제
스포츠 축제가 다수의 아사자를 발생시켰다
북한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진 계기 중 하나로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있다.한국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에 맞서 북한도 올림픽 개최에 나서지만 IOC 위원장 사마란치는 평양을 시찰했고 북한 개최는 어느 기회에든 말하고 귀국했다.
세계청년학생축제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열리는 스포츠·문화·예술을 포함하는 축제이다.
김정일이 이 축제를 자국 개최하자는 제안에 대해 아버지 김일성은 경제상황을 이유로 단호히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김정일은 남한에서 올림픽을 할 것이니 북한은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고, 이는 처음 부자가 정면충돌한 문제였다.
결과적으로는 김정일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도중에 일어난 일이었고 결정은 아들인 김정일 쪽으로 기울었다.즉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제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은 1987년에 일어났다.항공기 폭파범은 '서울올림픽의 한국 단독개최와 참가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기를 폭파하라'는 지령에 따라 범행을 저지른 테러사건이며, 이처럼 한국에서의 올림픽 개최는 북한의 체면을 구기는 이벤트 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매스게임과 탄도미사일 전시행진 등이 진행되고 있어 친숙한 노동절 스타디움은 이때 건조됐으며 다양한 호텔도 들어서 다른 나라에서 온 손님을 12,000명까지 무료로 초청했다.
당시 북한의 GNP 대부분이 투입돼 개최된 막대한 국비를 투입한 축제는 북한 재정을 위기 상황으로 몰아갔다.
이후 북한 내 배급이 중단되면서 대량 아사자가 발생하게 된다.당시 북한 외화의 60%?70%를 획득한 곳은 함경남도라는 지역이다.가장 먼저 집단 아사자를 낸 것이 함경남도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북한 국가가 크게 기울어진 것은 이 스포츠 축제를 둘러싼 많은 자금 투입에 있었습니다.그것은 한국에 대항하기 위한 허세의 산물이었습니다.
김정은의 어머니 고용희는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 2세-아버지는 재일조선인으로 전후 귀환사업으로 가족과 북한으
김정은의 어머니 고희훈(高容姫)은 재일교포 2세이자 일본 오사카 출생이다.이쿠노 코리아 타운 부근의 쓰루하시(鶴橋)에서 태어났다.1962년경 부모와 함께 북한으로 귀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용희의 아버지는 제주 태생으로 1929년 오사카로 건너간 재일교포로, 육군성이 비밀로 지정한 오사카의 '히로타 군복공장'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었다.북한과 조총련이 주도한 귀환 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제99회 귀환선을 타고 고용희를 포함하여 아버지의 아내 중 한 명인 어머니의 자녀 3명을 데리고 함경북도 명나라에 정착하였다.
평양음악무용대학(현 김원균 명칭 음악종합대학) 무용과를 졸업하고 1971년 만수대 예술단 무용수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고용희로 개명했다.1972년에 공훈 배우 칭호를 받는다.1973년 만수대 예술단이 일본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면서 일본 출신이었던 고용공주가 주목을 받으며 유명해졌다.고용희는 기쁨조에 들어가고 김정일의 마음에 들어 세 번째 정부가 된다.김정일로부터는 일본식으로 '아유미'라고 불렸다.북한의 공식 기록에는 제주도 북제주군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고용희 이후 2000년대 이후 유선암으로 치료를 받다가 2003년 암이 재발, 사실상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2003년 9월 교통사고로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해 프랑스 의료진이 극비리에 방북한 데 이어 2004년 파리의 한 병원에서 종양 및 뇌 관련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2002년 5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국가보위부장직을 맡게 된 김정남이 일본에 위조여권으로 입국했다가 발각되었다.추방되고 국가보위부장직도 해임됐다.이때 일각에서는 고용희가 김정남의 후계자 선정을 견제하기 위해 위조여권으로 일본을 방문했다는 정보를 흘렸다는 설이 있다. 고용희는 2004년 8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치료 중 심장발작, 암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로부터 3개월 전인 5월경에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이후 공개된 묘비에서 2004년 5월 24일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로 고용돼 일본 요리를 대접하고 김정은의 어린 시절 놀이 상대를 맡았다고 한다.아마도 고용희와 일본이라는 키워드는 관련이 있을 것이다.어쨌든 백두산 혈통이라고 하기에는 좀 복잡한 것 같다.
GDP 대비 24%를 군사비로 쓰는 북한 평화도 랭킹에서는 151위 세계평화도지수 2021에서 북한은 GDP 대비 군사비율이 24.0%로 조사 대상국 중 가장 많았다.평화의 정도를 수치화한 GPI 순위에서 북한은 조사 대상 163개국·지역 중 151위를 차지해 '매우 낮은' 수준으로 분류됐다.
GDP대비 최고수준으로 군사비로 사용하고 평화도는 매우 낮은 수준 ㅎㅎ 수고하세요.지금까지처럼 국력을 자멸을 위해 쓰십시오.
재일교포는 왜 생겨났는가?귀환 거부한 한국과 영원히 남아있는 재일교포
귀환 거부한 남한, 환영한 북한
귀환사업을 방해하려던 한국
자국으로의 귀환은 국민의 권리
국교정상화에서도 거부한 한국정부
자국민을 잘라버리는 이상사태
일본인귀환사업
현재도 계속되는 일본의 귀환사업
전후 재일동포 조선인 귀환사업은 한국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됐다.북한은 귀국 시 배 비용은 북한이 부담하겠다고 선언. 수용을 환영한다고 했다.
일본에서 월북한 사람들 중에는 한국에서의 제주도 4·3사건이나 여수·순천사건을 피해 일본에 온 전후 이주자도 많다.귀환 사업은 일본 적십자사와 조선 적십자사가 공동으로 진행했다.
남측은 이 귀환사업에 반발해 일본 어부들의 억류 연장, 무역단교, 테러공작원을 보내 니가타일 적폭파 미수사건을 일으켜 방해 계획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귀환사업의 일본측 요원 암살, 니가타항으로 향하는 철도 선로 폭파 등이 계획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귀환사업에 반대한 것은 한국이 귀환을 거부하고 북한이 수용함으로써 국제적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거주지 선택의 자유라는 국제법상 인도주의에 따라 귀국을 희망하는 사람에 대해 양국 정부가 협력해야 대량 귀환이 이뤄질 수 있다.게다가 전후의 처리는 원상 복귀를 목표로 하는 것이 대전제가 된다.
1965년 협정 안에서 한일 지위 협정이 체결되어 있다.국교정상화 시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어떻게 귀환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일본이 제기했을 때, 한국정부는 무려 이를 다시 거부했다 .이에 따라 일본에 거주하게 한 협정이 한일지위협정이다.
즉 한국정부는 자국민을 잘라버리고 저버린 .결과적으로 일본에 잔류한 한반도인들을 지원한 것은 북한이었다.현재도 조선학교에는 북한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그래서 조총련, 조선학교는 북한화됐다.
보통 나라의 결단이 아니다.자국민 귀환을 거부하는 이상사태다.덧붙여서 일본의 귀환 사업은 일본, 중국 정부의 협력 하에 이루어졌다.
만주 지역에서의 일본인 귀환은 1946년부터 실시되어 중국 항구에서 100만 명 이상의 일본인이 귀환했다.국공 내전을 거치면서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은 국교를 맺지 않아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집단 인양을 종료했다.중일 국교정상화 후 1981년부터 중국 잔류 고아의 인양이 개시되어 2,000명 이상이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잔류 고아란 일본인 인양 시 배가 나가는 시간과 승무원 정수는 정해져 있어 수십 km를 계속 걸어 행진을 멈추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그 중 많은 여성이나 아이들이 걷지 못하고 가족과 생이별하여 인신매매 등으로 중국인 아내가 되거나 입양되었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일시귀환원조, 영주귀국원조, 현지 정착, 자립원조 등을 지금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