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개방과 이마무라 균인도적 정책 점령지 통치요강에 의거
2021-10-21
카테고리:대동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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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개방과 이마무라 히토시
이마무라 히토시는 1942년 인도네시아 상륙작전을 지휘했다.일본군 병력은 5만5천명, 9일 만에 네덜란드군 9만3천여명과 5천여명의 영국군 미군 호주군을 무조건 항복시켜 군사작전은 성공했다.
착취를 거부한 이마무라
유배되었던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의 지도자, 수카르노와 하타등 정치범을 해방.일본에서 의류가 부족해 일본 정부는 자바섬에서 생산되는 면화의 대량 수입을 제의했지만 이마무라는 이 요구를 거부했다.
인도네시아가 생산하는 면화를 거론하면 현지인의 일상생활을 압박하고, 사망자를 백목면으로 감싸 매장하겠다는 종교심까지 훼손한다고 본 것이었다.
네덜란드 통치하에 금지되었던 독립가 인도네시아 라야가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마무라는 도쿄에서 그 음반을 만들게 해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기뻐했다.
인도적 정책 속행
나중에 상황조사를 위해 파견된 무토 아키라 소장은 강압정책의 필요성을 호소했으나 이마무라는 일본군의 점령지 통치요강에 규정된 공정한 위덕으로 민중을 열복시키고 군수자원시설 파괴복구한다는 규정에 따르고 있다고 반박하며 신요강 발령 전까지는 자바 군정 방침을 결코 바꾸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패전 후에도 인도네시아에서 싸운 일본군
일본의 패전 후 네덜란드 영국은 다시 식민통치를 위해 인도네시아로 돌아왔다.종전 후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가담한 일본군은 3천 명이라 하며 1천 명이 전사하고 1천 명이 인도네시아 독립 후 일본으로 귀국하고 1천 명이 인도네시아로 귀화했다고 한다.
영웅묘지에 안장되는 옛 일본군
전사한 일본군은 칼리바타 영웅묘지를 비롯해 각지의 영웅묘지에 묻혔으며 전후 살아남은 일본군들도 인도네시아 국적을 부여받은 인도네시아인으로 이들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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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1000만명의 아사자가 나오는 식량위기를 구한 쇼와천황의 말 -움직인 맥아더
포드 전 대통령에게 초대되어 첫 미국 국빈 방문 만찬에서 쇼와 천황은, 귀국민에게 직접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것을 염원하고 있었다고 발언하셨습니다.이게 무슨 뜻일까요?1945년 태평양 전쟁은 끝났지만 종전의 해도 주는 12월이 되자 일본은 극도의 식량난에 빠져 있었습니다.해가 바뀌어 이듬해가 되자 '1000만 명의 아사자가 나오지 않느냐'고 했습니다.쇼와 천황(昭和和天皇)은 문부대신인 마츠무라 겐조(松村謙三)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식료의 악화는, 이대로 진행하면 다수의 아사자를 내게 된다고 하지만, 전쟁에 도탄의 괴로움을 겪은 국민에게, 이보다 더 다수의 아사자를 내는 것은 아무래도 나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다.""정부에서는 미국에 대해 식량의 제공을 요청하고 있지만, 미국은 이것에 응낙을 해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 쪽에서는 식량의 대가로서 제공해야 할 아무것도 없으니, 어쩔 수 없다.""그래서 들으면 황실의 어물 중에는, 국제적 가치가 있는 것이 상당하다는 것이다.이에 따라 제국박물관 관장에게 명하여 조사하게 하고, 그 목록을 작성하게 한 것이 여기에 있다.>이것을 대가로 미국에 넘겨 식량으로 대체하여 국민의 기아를 하루라도 견디도록 하겠다.그렇게 처리하도록."이라고 전했습니다.
당황한 마츠무라였지만 맥아더 원수에게 쇼와 천황의 마음을 전하고 어물 목록을 내밀자 이미 첫 번째 면회에서 '내 몸은 어떻게 되든 국민을 도와달라'는 쇼와 천황의 말에 감동을 느낀 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천황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잘 알고 있지만, 자신으로서도 미국으로서도, 모처럼의 간청입니다만, 황실의 물건을 받아, 그 대가로 식량을 제공하는 등의 일은 면목을 걸고도 할 수 없다.」「이 목록은 폐하에게 돌려드리고 싶다.그러나 국민을 위하는 일왕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된다.자신이 현재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상 결코 일본 국민 속에 아사자를 내보내는 일은 시키지 않는다.반드시 식량을 본국에서 이입하는 방법을 강구하다.폐하께서 안심하시도록 말씀해 주었으면 한다." 목록을 반환한 후에 미국으로부터의 식량 지원책을 강구한다고 전했습니다.
GHQ란 연합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를 말하며, GHQ 본부는 과거의 제일 생명관으로서 도쿄도 유라쿠초에 있던 건물 안에 설치되었습니다.8월 15일 포츠담 선언 수락에 의한 종전이 선언되어 GHQ 본부가 설치된 것이 9월 15일.쇼와 천황이 주일 미합중국 대사관에서 맥아더를 방문한 것이 9월 27일입니다.이때 맥아더는 쇼와 천황이 목숨을 구걸하거나 망명 상담을 하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쇼와 천황은 자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 국민을 도와달라고 한 것에 맥아더는 크게 놀랐다는 이야기는 유명할 것입니다.이 쇼와 천황의 말은 훗날 GHQ의 점령 통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그 후 쇼와 천황은 다시 맥아더의 마음을 움직여 많은 일본인이 아사할 위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GHQ는 점령 정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일본의 전쟁에 대한 경위나 원인, 목적등을 조사해 검증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도쿄 재판에 의해 많은 전범이 된 사람들이 형을 선고받고, 일본은 1951년 9월 8일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이듬해에 발행됨에 따라 국제 복귀를 하게 됩니다.맥아더는 그해 5월 3일 미국 상원 군사외교합동위원회에서 일본이 전쟁을 시작한 목적은 대부분 안보 차원이었다.즉, 자위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포츠담 선언에는 당초 천황의 지위 보전이 적혀 있었지만, 그 후 삭제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한때는 소련의 참전을 기대했던 미국이지만, 루스벨트가 사망한 후 극비 사항이었던 원폭 연구의 존재를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트루먼이 알고 일본을 항복시키지 않는 문서로 바꾸었다고 합니다.천황의 지위 보전과 국체 유지는 일본이 고집하는 부분이며, 이를 미국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당초 천황의 지위 보전을 기록했습니다.그 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천황 폐하는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합니다.이 시점에서 자신의 생명이 지켜질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습니다.
1971년 9월 26일 쇼와 천황 황후는 유럽 공식 방문을 위해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에 일본항공의 항공기를 타고 들르고 있습니다. 쇼와 천황의 즉위 후 최초의 외유이자 천황으로서 사상 처음으로 외국 땅에 내린 장소가 미국 알래스카입니다.이때 대통령 리처드 닉슨, 패트리샤 닉슨 부부가 천황과 황후를 활주로까지 영접하고 있습니다.격납고 내에서 환영사·답사가 오간 후, 임시 영빈관으로 지정된 알래스카 지구군 사령관저에서 회담이 이루어졌습니다.이것은 전쟁 전까지 포함해 사상 첫 천황과 미국 원수의 면회가 되었습니다.
정식 미국 방문으로는 1975년 쇼와 천황(昭和和天皇)은 국빈으로서 포드(フォード元大統領) 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백악관에 있었습니다.이에 앞서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이 되는 일본 국빈 방문이 쇼와 천황의 방미 전년인 1974년 11월 18일부터 22일에 역시 포드 전 대통령에 의해 행해졌습니다.일본 천황의 방미에 대해 미국 여론은 거의 관심이 없어 보도되는 일이 없었지만, 쇼와 천황은 미국에 대해서는 당연히 원한을 품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미국 국민 누구나 상상한 일이었습니다.그리고 백악관 만찬에서 천황 폐하는 다음과 같이 인사를 했습니다.
「저는 오랜 세월, 귀국 방문을 염원하고 있었습니다만, 만약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는, 다음의 일을 꼭 귀국민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제가 깊이 슬픔으로 하는 그 불행한 전쟁 직후, 귀국이 우리 나라의 재건을 위해 따뜻한 호의와 원조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것에 대해, 귀국민에게 직접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라고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이어 지난 전쟁을 모르는 국민이 두 나라 모두 과반수를 넘으려고 합니다.그러나 비록 앞으로 시대가 변할지라도 귀 국민의 너그러움과 선의는 일본 국민 사이에 오래도록 구전될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되뇌자 행사장은 많은 박수로 들끓었습니다.즉, 황실의 어물을 내밀고 맥아더에게 식량 지원을 요청했을 때의 일을, 이 최초의 국빈 방문 만찬에서 감사의 뜻으로 미국 국민에게 전한 것입니다.
그 후 이 화제는 순식간에 미국 전역에 전해졌고, 6일 동안이나 연속으로 신문의 제1면에서 일본 천황의 방미가 보도되었습니다.전쟁 종결로부터 30년 후의 일이 됩니다.
쇼와 천황은 1901년 4월 29일에 탄생했고, 1941년에 선전의 조서로 일본은 대당아 전쟁에 돌입했다.패전 후에도 쇼와 시대에는 고도 경제 성장을 실시해, 세계 제 2위의 경제 대국이 됩니다.1989년 1월 7일에 쇼와 천황의 승하로 쇼와 시대에서 헤이세이 시대로 이어집니다.
메이지 시대에는 보신 전쟁에서 시작하여 청일, 러일 전쟁을 거쳐 한일 병합이 이루어졌습니다.다이쇼 시대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일본은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으로서 세계의 중심의 테이블 의자에 앉습니다.쇼와 시대는 천황의 재위 기간으로는 가장 길다고 여겨지는 62년으로, 대토우 전쟁, 고도 경제 성장, 그리고 경제 대국에 오르는 격동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에는 일본에 대한 경의로서 황기가 기록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
P R O K L A M A S I
Kami, bangsa Indonesia, dengan ini menyatakan kemerdekaan Indonesia.
Hal-hal yang mengenai pemindahan kekuasaan d.l.l., diselenggarakan dengan tjara saksama dan dalam tempo yang sesingkat-singkatnya.
Djakarta, hari 17 bulan 8 tahun 05
Atas nama bangsa Indonesia,
Soekarno/Hatta.
선언
우리 인도네시아 민족은 여기에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한다.
권력 이양 및 그 밖에 관한 사항은 완전하고 가능한 한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자카르타 200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 민족의 이름으로
스카르노 / 핫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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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05년은 황기 2605년을 의미합니다.즉, 일본의 진무천황이 즉위한 후에 손꼽히는 일본의 달력 표기입니다.수카르노 대통령과 하타 부통령은 인도네시아를 독립으로 이끈 일본에 대한 경의를 독립선언에 적었습니다.
반둥회의에서 환영받은 일본~참가자 카세 슌이치는 대동아공동선언을 작성한 인물
1955년, 29개국이 참가한,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출석한, 카세 슌이치 외상 참가는, 당시의 각국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아시아 각국도 잘 왔다 일본 덕분이라며 환영을 받았다. "아시아 민족을 위한 일본의 용전과 그 의의를 내세운 대동아 공동선언은 역사에 빛난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대표단 단장인 고碕 다쓰노스케 경제심의청 장관 등 일행은 갓 독립한 아시아, 아프리카 신흥국 대표들의 환영을 받으며 잇따라 따뜻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일본은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점령이 끝나고 국제사회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의 일본에 있어서, 불안을 안고 참가했습니다. 정부 내에는 보류론도 있었을 정도였지만, 예상과 반대로 반가운 환영을 받은 것입니다. 카세 슌이치 대표 대리는,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 고碕대표와 동행했습니다.
각국 대표의 말을 인용해 일본이 대동아 선언이라는 것을 내놓고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전쟁 목적으로 한, 그 선언이 없었다면, 혹은 일본이 아시아를 위해 희생하고 싸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영국의 식민지, 네덜란드의 식민지, 프랑스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일본이 큰 희생을 치르고 아시아 민족을 위해 용전해 주었기 때문에 오늘의 아시아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듬해 일본은 맑게 유엔에 가입했고, 가세는 초대 유엔 대사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카세는 아시아아프리카그룹이 시종일관 열심히 일본의 가입을 지지한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아시아·아프리카 제국으로부터 큰 신뢰와 기대를 받아 전후 우리나라는 오늘의 번영을 쌓아 온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자막 있음
카세 슌이치는 시게미쓰 외무상의 비서관으로, 1943년 아시아 각국 대표를 초청해 개최된 대동아회의에 참가하고, 그 핵심이 되는 대동아 공동선언의 원안을 쓴 외교관입니다. 카세는, 저서, ( 「그때 「쇼와」가 바뀐 101세, 최후의 증언」)에서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대미전쟁은 자존자위를 위해 궁지에 몰려 일어선 타타카이였지만 수백 년에 걸쳐 서양의 식민지 지배 아래 있던 아시아를 해방시킨 것입니다. 개전 3년 후 대동아선언의 원안은 시게미쓰 외무상과 제가 고심해서 쓴 것이었습니다.
그 항복 조인식 날에 그런 말을 서로 하지 않은 것은 세계사적인 싸움이 끝나고 일본은 인류사에 의해 주어진 역할을 다했다는 긍지가 가슴속에 있었다. 진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결코 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오기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후 이 대동아 공동선언을 오로지 군부가 점령지역을 착취하는 연막에 이용한 것처럼 해석하기 쉽지만 진의는 일본의 전쟁 목적을 천명하는 데 있었다.
어쨌든 일본의 앞선 전쟁 때문에 독립한 아시아 국가들은 오늘날에도 대동아 공동선언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아시아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여러 민족까지 일본이 제창한 식민지 해방운동에 진심으로 감사했던 일은 내가 1955년(쇼와 30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일본 정부 대표로 참석했을 때나 초대 유엔대사로 유엔에 있을 때에 친근하게 감득했다.
대동아 공동선언이 일본에서 경시되고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자, 어떻습니까? 대동아회의 사진만 봐도 기분 나쁘다고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얼마나 역사를 배우지 못했음을 알 수 있을까요? 이러한 사람들은 서구의 시선이나 중국, 반도의 시선에서만 역사를 배우고 있어 일본에 있어서의 전쟁, 아시아에 있어서의 전쟁이라는 시점이 점점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 채택된 선언을 소개하겠습니다.
기본적 인권과 유엔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존중모든 국가의 주권과 영토보전을 존중모든 인류의 평등과 대소 모든 국가의 평등을 승인하는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유엔헌장에 의한 단독 또는 집단적인 자국방위권을 존중집단적 방위를 강대국의 특정한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지 아니한다. 또 다른 나라에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 침략 또는 침략의 위협·무력 행사에 의해서, 타국의 영토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을 두지 않는다. 국제분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 해결상호간의 이익과 협력을 촉진하는 정의와 국제의무를 존중
아프리카 각국은 1400년대 중반부터 아메리카 대륙과의 노예 무역이 이루어졌습니다. 1800년대 초부터 서양으로부터의 분할로 식민지화됩니다.
아시아 각국은 그보다 일찍 1500년대 초부터 식민지화가 시작되었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등은 400년 이상 식민지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일본을 둘러싼 환경은 아시아 각국이 차례로 식민지화되면서 드디어 일본과 코앞인 한반도와 중국으로 서양의 손이 뻗어가던 가운데 아시아를 식민지화하던 서양 열강을 구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벌어진 것이 대동아전쟁이었습니다. 이 수백 년의 서양 지배 속에 있던 동남아시아에서 일본 통치 시대는 불과 2년에서 5년이지만, 이 기간에 동남아시아 각 지역은 국력을 갖추고 무기 사용법, 전투 방법, 국가 운영 방법 등을 일본으로부터 배웠으며, 일본이 패배한 후에 독립 전쟁을 차례로 치렀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철수한 후에 아시아 각국은 독립을 이루고,
1960년에는 아프리카 17개국이 일제히 독립을 달성했고, 1960년은 아프리카의 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유엔 총회는 그해 12월 14일 '식민지와 인민에게 독립을 부여하는 선언'을 채택합니다. 그리고 1964년 미국에서 공민권법이 제정되어 인종차별을 긍정하는 주법이 폐지됩니다. 그리고 1969년에는 유엔에서 인종차별철폐조약이 발효됩니다.
이처럼 얼마나 일본의 전후 교육이 편향되어 있는지 깨달을까요. 이러한 유색인종의 오랫동안 억압되고 지배되어 온 역사, 그리고 일본의 전쟁의 목적 등에 대해서는, 전후 일본 국내에서는 이야기되는 것도 없고, 국제사회에서는 이른바 마이너리티 리포트입니다. 그리고 국제사회 안에서 일반화되는 일은 없습니다.그러나 이것들은 많은 유색인종 국가의 목격자가 있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라고 해도, 이 반둥 회의에 참가한 아시아·아프리카 각국의 인구는, 당시 약 13억명이라고 해, 1955년 당시의 세계 인구가 27억명이라고 생각하면, 약 반수가 목격하고 있는 사실이며, 왜 이것이 일반화되지 않는가 하면, 개발도상국이며, 대수롭지 않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요.
이런 전제가 깔려 있어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참가한 일본은 대환영을 받은 셈입니다. 그들 나라들은 일본 덕분에 자신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는 결의가 생겼다고 입으로 말합니다. 이것도 잘못된 역사일까요?
난징 대학살에 대한 14가지 의문.의문만 생기는 증언자와 재판 10만 명을 세어 봅시다
도쿄 재판과 난징 군사법정은 같은 시기에 병행해서 열리지만 난징 군사법정에서는 30만 명의 학살.도쿄 재판에서는 20만명까지 가지 않는 10만명 이상이지만, 증거의 공유는 행해지지 않았던 것일까.10만명20만명의 오차 는 무엇일까.
도쿄 재판에서 증언대에 선 독일인 존 라베는 학살이 5만 명 정도일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는데, 이 숫자는 어디서 온 것일까.
혼자서 사방으로 달아나는 5만 명을 헤아렸을까.장애물이 전혀 없어도 힘든 작업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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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을 겨냥한 도쿄 대공습은 100회 이상 이루어졌으며, 최대 공습 사망자는 회당 10만 명입니다.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1차 사망자는 8만 명, 나가사키는 6만 명이라고 합니다.당시 난징에는 원자폭탄 이상의 파괴력 를 가진 일본군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이것은 틀림없이 세계 최강의 육군입니다.그렇다면 왜 일본은 전쟁에서 졌을까.
어떻게 30만 명을 살해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보겠습니다.사방으로 도망치는 민중에 대해서는 전차, 대포 등 직사포나 수류탄도 유효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렇다면 도망칠 수 없는 건물에 민간인을 가두는 것은 어떨까요.그래서 생각나는 것이 나치 최대의 유대인 수용소 아우슈비츠입니다.하지만 최대 수용인원은 2만 명에 불과하니 이를 10개 이상 3일 만에 만들면 가능할까.그러나 그곳으로 어떻게 민간인을 연행해야 하는가.
도쿄 재판에서 증언대에 선 미국인 매기 목사는 학살을 호소하지만 실제로 목격한 것은 몇 건이냐고 묻자 살인 1건, 강간 1건, 절도 1건 였다.10만 명→20만 명→30만 명이 살해됐다는 혼란 속에서 그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일본 육군이 난징에 도착하자 국민당 사령관은 군대를 두고 도망쳐 패닉 상태에 빠진 병사들은 군복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민간인 행세를 하며 민가로 도망쳐 전투를 계속했습니다.군인과 민간인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민간인을 방패로 전투 를 계속하는 도덕성이 높은 훌륭한 병사에 대해서.
난징안전구(국제법상 비전투지역)에 난징시민들은 대부분 대피했다는 기술이 난징안전구 자료에 남아 있습니다.그리고 일본군은 난징안전구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았다 라고 난징안전구가 증언하고 있는데 일본군은 도대체 누구를 살해했는가.
존 라베는 일본군이 모젤총을 사용해 민간인을 살해한 것을 목격했다고 나중의 라베 일기에 기록하고 있는데 Mr. 라베. 하나 확인해 달라.당시 일본에모젤총은존재하지않음 .이것은중국군총입니다. 그리고 모젤총은 당신의 조국.독일 제조 아닐까요?
라베의 일기에 성기에 대나무가 박힌 여성의 시신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고 적고 있다.일본에서도 여성을 강간하거나 살해하는 사건은 일어나지만 대나무를 성기에 꽂는 풍습은 없다.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풍습인가.그리고 누구 짓이냐.
난징으로 진군하기 전 상하이에서 큰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패주하는 중국군은 초토 작전을 실행했습니다.거리에 불을 지르고 금품을 강탈하고 강간하며 적병이 점령해도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만드는 철수입니다.동시에 병사는 졌음에도 불구하고 전리품을 얻을 수 있습니다.갑신정변 때 일본과 청나라가 교전하여 패주하는 청나라 군대가 한반도 민가를 향해 펼친 작전입니다.
난징 안전구는 난징의 인구를 파악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전쟁 난민 등이 난징 안전구로 피난하여 이주하기 위해 주민대장 기록을 하고 있었습니다.일본군의 난징 공략 직전 기록된 인구는 20만명 입니다.일본군은 인구 이상의 민간인을 살해한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통일호적 관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1958년 호구 등기 조례부터입니다.그동안 중국의 인구는 지역 행정구별로 독자적인 방식으로 기록했던 것을 집적했을 뿐 통일관리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난징 군사법정에서는 도대체 어떤 주민기록을 채택했을까.
동일본 대지진으로 1.59만 명이 사망했는데, 사망 인원은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이것은 기타 대규모 재해에서도 공통적입니다.시체를 세거나 소문을 채택하는 어리석은 방법이 아닙니다.사망자 수 + 실종자 수 + 생존자 수 = 현행 주민대장 수임을 전제로 새롭게 이주 등으로 증가한 인원을 공제합니다.그리고 실종자 수로 사망이 확인된 단계에서 사망자 수로 넘어갑니다.지진 재해 사망자를 육안으로 세다?말도 안돼.
난징 안전구 기록은 다음 달 1월 인구가 25만 명으로 증가 했습니다.인구 이상의 민간인이 살해된 지 한 달 만에 5만 명이나 늘었다.일본 육군은 어떤 마법을 썼을까?
난징 사건에 대해서는 모순투성이에요.애초 같은 시기에 진행된 극동군사재판과 난징군사법정에서는 전혀 내용이 다릅니다.
홍사익은 한반도 이름을 계속 밝힌 옛 일본육군 중장 - 창씨개명 강제는 새빨간 거짓말.
한반도 출신 일본군
한반도 이름을 딴 일본군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
"예전보다 누명에 의한 사형은 많고 나 또한 그렇게 되는 것 같다.""끙 앓아봐도 푸념이 되고 패전죄로 포기하는 게 좋겠다.
이것은 홍사익이 지은 사세의 구절니다.일본군에 종군하여 한반도인으로서 최고위 가 되는 육군 중장까지 오른 경기도 출신 인물입니다.
두뇌가 명석하고 군인으로서도 뛰어난 반면 창씨개명 때 신고하지 않고 한반도 이름을 지었다(창씨개명 신고가 없으면 원래 이름으로 등록된다).
한국에서는 창씨개명으로 일본으로부터 한국명을 빼앗겼다고 주장하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창씨개명은 자기신고 제도이지 강제가 아니다.강제라면 그 명령을 어긴 인물 가 왜 한국 이름 그대로 육군 중장이 될 수 있을까.
홍사익은 한반도 내 반일세력에 지금 궐기하는 것은 조선의 독립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잠시 연찬을 쌓고 실력을 양성한 뒤 싸워야 한다며 친구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홍사익은 필리핀에 부임해 그곳에서 종전을 맞는다.종전 후에는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세상에 작별을 고하는 사세의 구절에서 일본이나 병합에 대한 원한 따위는 추호도 읽을 수 없다.
홍사익은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다.한국에 돌아가서도 친일로 죄인 취급을 받고 여러 번 무덤을 파헤치게 되므로 일본에서 영원히 모셔지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