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개방과 이마무라 균인도적 정책 점령지 통치요강에 의거
2021-10-21
카테고리:대동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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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개방과 이마무라 히토시
이마무라 히토시는 1942년 인도네시아 상륙작전을 지휘했다.일본군 병력은 5만5천명, 9일 만에 네덜란드군 9만3천여명과 5천여명의 영국군 미군 호주군을 무조건 항복시켜 군사작전은 성공했다.
착취를 거부한 이마무라
유배되었던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의 지도자, 수카르노와 하타등 정치범을 해방.일본에서 의류가 부족해 일본 정부는 자바섬에서 생산되는 면화의 대량 수입을 제의했지만 이마무라는 이 요구를 거부했다.
인도네시아가 생산하는 면화를 거론하면 현지인의 일상생활을 압박하고, 사망자를 백목면으로 감싸 매장하겠다는 종교심까지 훼손한다고 본 것이었다.
네덜란드 통치하에 금지되었던 독립가 인도네시아 라야가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마무라는 도쿄에서 그 음반을 만들게 해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기뻐했다.
인도적 정책 속행
나중에 상황조사를 위해 파견된 무토 아키라 소장은 강압정책의 필요성을 호소했으나 이마무라는 일본군의 점령지 통치요강에 규정된 공정한 위덕으로 민중을 열복시키고 군수자원시설 파괴복구한다는 규정에 따르고 있다고 반박하며 신요강 발령 전까지는 자바 군정 방침을 결코 바꾸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패전 후에도 인도네시아에서 싸운 일본군
일본의 패전 후 네덜란드 영국은 다시 식민통치를 위해 인도네시아로 돌아왔다.종전 후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가담한 일본군은 3천 명이라 하며 1천 명이 전사하고 1천 명이 인도네시아 독립 후 일본으로 귀국하고 1천 명이 인도네시아로 귀화했다고 한다.
영웅묘지에 안장되는 옛 일본군
전사한 일본군은 칼리바타 영웅묘지를 비롯해 각지의 영웅묘지에 묻혔으며 전후 살아남은 일본군들도 인도네시아 국적을 부여받은 인도네시아인으로 이들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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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에는 일본에 대한 경의로서 황기가 기록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
P R O K L A M A S I
Kami, bangsa Indonesia, dengan ini menyatakan kemerdekaan Indonesia.
Hal-hal yang mengenai pemindahan kekuasaan d.l.l., diselenggarakan dengan tjara saksama dan dalam tempo yang sesingkat-singkatnya.
Djakarta, hari 17 bulan 8 tahun 05
Atas nama bangsa Indonesia,
Soekarno/Hatta.
선언
우리 인도네시아 민족은 여기에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한다.
권력 이양 및 그 밖에 관한 사항은 완전하고 가능한 한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자카르타 200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 민족의 이름으로
스카르노 / 핫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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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05년은 황기 2605년을 의미합니다.즉, 일본의 진무천황이 즉위한 후에 손꼽히는 일본의 달력 표기입니다.수카르노 대통령과 하타 부통령은 인도네시아를 독립으로 이끈 일본에 대한 경의를 독립선언에 적었습니다.
전후 쇼와 천황의 전국순행 - 이동거리는 3만3천km에 이른다.
종전 직후 천황 폐하는 GHQ 맥아더의 집무실을 방문합니다.맥아더는 천황폐하가 망명의 협조를 요청 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국가원수가 그대로 국가에 머무른다는 것은 서양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습니다.왕조의 교체, 처형, 망명이라는 것이 세계의 상식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이미 자살했고 무솔리니는 처형되었습니다.
천황이 맥아더에게 한 말은 '내가 어떻게 되든, 일본 국민의 목숨을 살려달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놀란 맥아더는 일본 통치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이 바뀌었다고 나중에 회상록에 기록했습니다.
그 후 천황 폐하는 전국 순행으로 출발합니다.일본 전국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국민 개개인을 격려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점령하에서 천황폐하가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고민에 빠진 결론이었습니다.
극동군사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그것은 시작됩니다.군대도 해체된 후 경호도 적게 다니고 백성들에게 돌을 던지거나 매달아 목에 맞을 수도 있다고 GHQ는 순행을 쉽게 허용합니다.
패전 후 황야가 된 사람들의 혼란 속을. 누구나 살해할 수 있는 각지를 돌아다니다.그런 각오의 여행이었습니다.
수만 명의 군중 속을 순행하며, 전국 총이동거리는 3만 3천 km , 총일수는 165일에 달합니다.GHQ에서는 소수의 동행자만 있었습니다.원폭 투하를 당한 히로시마에는 70년 초목도 자라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국가로서 방사능 지식은 전혀 없고 소문만 만연해 히로시마에 살고 있는 사람 이외에는 접근하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1947년 천황 폐하의 모습이 히로시마에 있었습니다.사람들은 용기를 얻었고 히로시마 이외의 사람들도 '천황폐하가 오셨으니 이제 히로시마는 괜찮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크게 변화했습니다.
야키노하라가 된 전후의 일본을 순례하며 많은 일본인들이 용기를 가졌다고 합니다.
전국 순행은 GHQ의 예상을 크게 빗나갔습니다.돌멩이 하나 던져지기는커녕 여기저기서 환영하는 국민의 모습 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영국 등도 경악의 사태라고 보도하며 유럽 전역에 알려졌습니다.
긴 순행은 홋카이도(北海道)를 마지막 지점으로 종료됩니다.평생 희망했던 오키나와(沖縄)를 방문하지 못한 것이 유일한 아쉬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오키나와 방문은 아키히토(明仁) 상황폐하에 의해 행해지고 있습니다.
패전후 일본인 천황폐하에 대한 경애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에 서구 국가들은 놀랐습니다.
홍사익은 한반도 이름을 계속 밝힌 옛 일본육군 중장 - 창씨개명 강제는 새빨간 거짓말.
한반도 출신 일본군
한반도 이름을 딴 일본군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
"예전보다 누명에 의한 사형은 많고 나 또한 그렇게 되는 것 같다.""끙 앓아봐도 푸념이 되고 패전죄로 포기하는 게 좋겠다.
이것은 홍사익이 지은 사세의 구절니다.일본군에 종군하여 한반도인으로서 최고위 가 되는 육군 중장까지 오른 경기도 출신 인물입니다.
두뇌가 명석하고 군인으로서도 뛰어난 반면 창씨개명 때 신고하지 않고 한반도 이름을 지었다(창씨개명 신고가 없으면 원래 이름으로 등록된다).
한국에서는 창씨개명으로 일본으로부터 한국명을 빼앗겼다고 주장하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창씨개명은 자기신고 제도이지 강제가 아니다.강제라면 그 명령을 어긴 인물 가 왜 한국 이름 그대로 육군 중장이 될 수 있을까.
홍사익은 한반도 내 반일세력에 지금 궐기하는 것은 조선의 독립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잠시 연찬을 쌓고 실력을 양성한 뒤 싸워야 한다며 친구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홍사익은 필리핀에 부임해 그곳에서 종전을 맞는다.종전 후에는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세상에 작별을 고하는 사세의 구절에서 일본이나 병합에 대한 원한 따위는 추호도 읽을 수 없다.
홍사익은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다.한국에 돌아가서도 친일로 죄인 취급을 받고 여러 번 무덤을 파헤치게 되므로 일본에서 영원히 모셔지는 것이 좋겠다.
진주만 공격은 세계 최고 수준의 영전과 우수한 조종사의 작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처음 사용된 항공기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작전능력이 극히 제한적이라고 여겨졌다.항행 중인 전함을 공격하기에는 과녁이 작아 폭탄을 명중시키기도 어려워 항공기가 전함을 가라앉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미국은 미리 진주만 공격을 알고 있었지만 피해는 최소한이라고 생각했다.그보다 일본이 선제공격을 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진주만 공격에 사용된 항모는 6척.항공기는 350대이다.항모를 복수 운용한 나라는 없었다.이유는 다른 배에서 비행기가 대량으로 날아오르면 공중충돌 위험이 커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일본은 가장 먼저 항공기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있었다.그래서 세계 최경량 영전을 개발했고 조종사 훈련도 몇 년 만에 했고 진주만 공격 때 조종기술은 최고점에 있었다.
항공모함 6척에서 일제히 항공기가 이륙해 한 대도 충돌하지 않고 공중에서 만나 진주만으로 일제히 향한다.그 몇 배나 어려운 것은 공격을 마친 1진이 일사불란하게 항공모함으로 차례차례 귀환하고 교체하듯 2진이 이륙한다.
갑자기 나타난 대량의 항공기에 미국은 맥이 빠진 것이다.도대체 이 대량의 비행기는 어디서 날아왔냐고.진주만 공격 이틀 만에 베트남 앞바다를 항해 중인 영국 동양함대가 영전에 가라앉았다.
침실에서 이 보고를 받은 처칠은 경직돼 한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영국 동양함대의 궤멸은 영국의 아시아 지배 종료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