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외발자전거 사진으로 보는 한일병합 전 한반도의 기술력과 지식
2021-07-13
카테고리:이씨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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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 만드는 기술이 없었던 조선
이 사진은 옛날 한반도의 재미있는 놀이기구처럼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첫 번째 사진은 무려 한 바퀴의 대차에 사람을 태우고 이동하고 있다.
우스꽝스러움은 차치하고, 이것을 효율성이나 코스트의 시점에서 2번째의 사진과 비교하면 어떨까.두 번째는 일본의 인력거이지만, 어느 쪽도 근대적인 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차이점은 한 바퀴냐 두 바퀴냐 하는 것이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어 중국에서 수입하던 .수레바퀴는 값비싼 것이어서 양반이라지만 수레바퀴 하나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그 결과 가장 다른 점은 차를 움직이는 인원이다.한 바퀴의 경우 위에 사람이 타면 불안정해져 앞뒤로 2명 이상이 필요하다.두 바퀴의 경우 안정되기 위해 혼자 운용 가능하다.
효율이 오르지 않는 운반기술과 유통
바퀴보다 인간의 비용이 훨씬 저렴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아니면 인건비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일까.운반 효율이라는 점에서 생각하면 농사나 물건 운반에 대해서도 모든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 두 배의 인력이 필요하다면 생산효율이 올라갈 리 없다 . 양반조차 한 송이뿐이니 서민들은 바퀴조차 못 썼을 것이다.당시 조선시대를 기록한 서양인의 기록에는 한반도 사람들이 머리 위에 물건을 대량으로 올려놓고 나르고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MEMO 이씨 조선 말기에는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노비였다고 합니다.노비에게 그냥 명령하면 인건비는 들지 않아요.
조선에는 양과 차와 바늘이 없었다
조선시대 정동요라는 유생(실학자)이 쓴 책 <주영편>에 따르면 조선에 없는 것으로 <양과 수레와 바늘>이라고 적고 있다.이씨 조선시대 바퀴를 만들기 위한 나무를 구부려 둥글게 가공하는 기술은 없었고 마차, 소달구지, 인력거, 농사용 물레방아가 없었다 .
이걸로 작업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바늘이 없다는 것은 금속 가공 기술이 현저히 낮았음을 나타낸다.
바늘을 만들려면 금속을 가늘고 끝을 뾰족하게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고 게다가 부러져서는 안 된다.그리고 뒷부분에 실을 통과시킬 수 있는 구멍을 가공할 필요가 있다.이씨 조선시대에 바퀴와 바늘은 중국에서 구했다.
아울러 읽고 싶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한반도는 자력 근대화는 불가능했다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도구가 없으면 만들 수 없다.그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다시 그 도구를 만들기 위한 도구가 필요하다.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가 없어도 한반도는 근대화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수레바퀴조차 만들지 못한다면 산업혁명이 가능할 리 없다.어떻게 증기기관을 이용한 거대한 산업기계를 만들까.
일본의 금속가공, 연마기술은 세계제일
일본의 산업혁명은 1,000년을 넘어 전승된 장인기술을 바탕으로 가능해졌다 .서양에서 배운 생산설비와 철도 등을 가식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일본에서는 특히 현재에도 다양한 세계특허를 갖는 전제기술로서 연마기술이나 금속가공기술이 있다.그 이유는 일본에서는 칼 문화가 오래 지속되어 대장간이 금속을 가공하는 전통 기술을 오래 전승하고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민둥산뿐이던 한반도
한반도는 겨울에는 춥고 따뜻해지기 위해 산에서 나무를 베지만 무작정 베었기 때문에 일본이 왔을 때는 나무도 나지 않은 민둥산뿐이었다.나무가 없는 산에 비가 오면 곧 많은 양의 물이 밀려들어 밭을 침수하고 농작물은 빈번히 괴멸하였다.
일본은 한반도의 산들에 차례차례 식림을 해 나갔다.그 수는 1911년부터 10년간 10억개 에 이른다.이는 산업혁명에서의 기술발전과는 무관한 문제다.이는 노동의 효율화와 계획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씨 조선시대는 국민의 노비화로 인해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아 기술의 전승이나 지식이 끊긴 상태였다.
POINT 한일병합으로 일본에 수탈당했다고 한국은 외치지만, 일본이 갔을 때 한반도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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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임오군란에서 갑신정변,청일전쟁까지의 한반도 변화 - 천진조약 위반이 청일개전의 원인
민비는 일본형 개혁론자였다
청나라에 구제를 요구함으로써 책봉 정책이 명문화
갑신정변을 지원한 일본
러시아에 다가가는 민비
청나라가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은 조약 위반
나라를 버리고 망명한 국가원수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반도
민비는 당초 일본형 개화정책을 주장했었다.일본에서 사관병급 인사를 여럿 초빙해 군사교육을 하고 있다.이에 대한 반발로 인한 대원군 측의 폭동이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이다.이에 당황한 민비는 청나라에 접근하고 민비의 요청에 응한 청나라는 대원군을 붙잡아 연금하고 민비정권을 지원하여 폭동을 진압 한다.
이로써 청나라에 의한 한반도의 책봉정책이 명문화되게 된 . 거기서 중국지향의 개화정책을 취하게 된 민비와 일본형의 개화정책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분열하게 된다.
일본형 개화정책을 주장한 것이 김옥균이다.그리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다.이는 3일 천하로 불리는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으킨 민비 타도의 쿠데타지만 다시 청나라의 힘에 의해 실패로 끝난다.
이때 갑신정변을 지원하던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국지전이 벌어진다.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도 청일은 계속 눈싸움을 하고 톈진조약을 맺음으로써 긴장이 완화된다.
조약 내용은 청일 양국 모두 한반도에서 철수한다.다음에 한반도에 출병할 때는 사전 통고한다."는 것이었다.즉, 다음에 어느 한쪽이 출병하면 전쟁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던 .
일본과 청나라는 편리하게 한반도에 사용되었으나 일촉즉발의 상태를 일시 회피합니다.
일본과 청나라가 철수한 후에, 민비는 무려 러시아에 가까워지는 .러시아와 손잡으면 일본과 청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민비는 당초는 일본, 다음에 청, 그리고 청일이 철수하면 러시아가 붙는, 3다리 외교를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던 중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한다.폭동을 진압할 수 없다고 생각한 민비는 무려 다시 청에 파병을 의뢰한 것이다.
당연히 일본에는 사전 통지가 오고, 톈진 조약 파기를 바탕으로 일본도 출병하게 된다.이것이 청일전쟁의 발단이 된다.그리고 톈진조약 뒤편에서 민비가 러시아와 내통한 것이 러시아의 한반도 남하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1895년 민비는 암살당하고(을미사변), 1896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하여 망명을 시도하고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노관파천). 그리고 조선의 원격 통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경복궁으로 돌아온 뒤 대한제국을 건국하는 것도 러시아와 계속 통한다.이로써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추진되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한국의 양다리 정책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당시는 중일러라는 대국에 3다리 외교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종합하면 한반도는 문명개화가 되지 않아 어느 나라의 지원으로 성장하고자 일본형 개화정책을 폈으나 내홍이 터지자 곧바로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개화는커녕 책봉하가 되고 말았다.
청일전쟁은 바로 국내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청나라에 울부짖은 데서 비롯된다.그리고 다음으로 러시아에 접근해 한반도로 러시아를 끌어들임으로써 러일전쟁으로 발전했다.
주체성 없는 외교를 펼치며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발단 중 하나가 한반도입니다.그것을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봉건제와 근대화의 관계 조선 왕조에는 산업 혁명에 필요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없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산업혁명을 성공시킬 수 없다.산업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무산자 계급), 즉 노동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유신군이 쇄국정책의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면서 지향한 것은 개국은 물론 봉건제도 탈피이자 막번체제 파괴다.즉 사람들이 봉건제 안에 있어 토지에 묶여 있는 이상 유동적인 노동력을 확보할 수 없다.
새로운 산업 발전에 있어서도 필요한 인재가 필요한 장소에 모일 수 없다.메이지 유신으로 발생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토지에 얽매이지 않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이 있다.
당시 한반도를 볼 때 봉건제는커녕 노비제였고 그것은 중세 사회의 것이다.더구나 내실을 따졌을 때 중세기에 발전할 만한 것이 일절 발전하지 않아 그 사회는 중세 이전의 상태였다고 한다.
이처럼 노비가 땅에 묶여 주인에게 얽매이고 자유도 없다면 산업발전을 지탱할 노동력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구래의 봉건적 사회체제의 타파는 불가결하게 된다.메이지유신이 그랬고 신해혁명은 청나라를 탈피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이유로 근대화를 목표로 노비제도 폐지를 목표로 한 김옥균의 생각은 옳은 것이다.조선왕조를 무너뜨려야 근본적인 사회개혁이 가능하고 근대화의 길은 거기서 비롯된다.
김옥균 한국서 평가 안 받아 - 한국 대통령은 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안하나
왜 한국에서 김옥균이 평가받지 못하는지 궁금하다.적어도 일본에서의 평가와는 정반대의 평가다.사흘 천하란 그를 야유하는 말일까.분명 이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너무나 부주의한 쿠데타였다고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김옥균보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 훨씬 영웅인 듯하다.
일본은 유색인종 국가로 유일하게 산업혁명 및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다.김옥균은 이에 착안해 한반도의 근대화를 지향했다.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 근대화의 핵심을 담당한 사람들과 교류를 심화시켰다.
김옥균이 주창한 삼화주의란 일본 한반도 중국이 서로 독립을 유지하고 협력해 서양의 식민지 정책에 맞서자는 것이다.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지향하는 길과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중국의 신해혁명을 지탱한 미야자키 도도천은 김옥균이 한반도의 손문이 되는 인물이었다고 칭했다 .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암살된 뒤 시신은 한반도로 돌려보낸다.두 번째 처형을 당하기 위해서다.토막토막 절단된 시신은 한반도 전역에 노출됐다.
예전에 한국인에게 왜 김옥균은 평가받지 못하냐고 물었을 때 김옥균은 시대를 잘못 보고 실패한 인물이라고 했다.참살당했으니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뜻이다.귀를 의심하는 발언이었다.
김옥균은 민비에 의해 보낸 자객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당합니다.김옥균을 상해로 불러들인 것은 바로 김옥균의 친구였습니다.
김옥균 참살 소식은 일본 내를 분노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장례식이 거행된 아사쿠사 히가시혼간지에서는 '청나라를 혼내라!청나라를 쓰러뜨려라!'의 대합창이 되었다고 한다.
그 반년도 지나지 않아 동학당의 난이 일어나 천진조약을 어긴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裕吉)는 김옥균(金玉均)을 귀여워하며 여러 차례 사저로 초청했다.그러나 한반도 자립근대화의 목표를 보고 탈아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결과는 일본이 청나라를 쓰러뜨리고 한반도는 독립국가가 되었다.고인이 된 김옥균의 사이였던 서재필에 의해 그 기쁨을 표현한 독립문이 현재의 서울에 건설되었다.독립문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한 것이지만, 일제로부터의 독립의 상징이라고 한국에서는 믿고 있다.현재 김옥균의 묘소는 일본 아오야마 영원에 놓여 있다.
참살당했으니 패자일까.나라를 위해 진실된 행동을 한 인간만이 후세에 그 길을 맡길 수 있다.대동아전쟁에 지원한 한반도 병사들도 마찬가지다.그들은 일본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다.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싸웠을 것이다.
당시 한반도 근대화를 뒷받침했던 사람들도 매국노처럼 취급된다.이런 진실의 발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한국은 정말 싫어하는 것 같다.
대동아전쟁에서 순사한 한반도 병사들이 잠든 야스쿠니 신사에 우리 대통령이 참배하지 않는 것은 이 또한 이상할 일이 아니다.한국은 진정한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싸운 병사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옛 일본군에 종군하다 전사한 조선인 병사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습니다.한국 대통령이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는 일은 없습니다.
순송은 한일 병합 후에도 당구에 흥하는 생활 - 일본은 한반도를 노예화했다는데?
한일병합 후 순송의 컨디션은 회복
당구나 프랑스 요리를 흥겹게 하는 나날
천황폐하를 경애한 순송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송(李坧)은 한일 병합 후 경성부 창덕궁에서 살다가 왕으로 책립되어 이왕으로 칭해졌다.
병합 전에는 심신이 쇠약해져 시종에 의지하지 않으면 보행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이 무렵에는 보행이 가능해지면서 쾌활하게 응대하게 되었다.
테라우치 마사키는 「국사다난의 심통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고 있다.
이왕은 매우 신경질적이어서 기상 목욕 취침 시간은 스스로 시계를 보고 제시간에 했다.평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취미인 당구에 흥했고 밤에는 축음기를 듣는 생활을 했다.
또 이태왕이 된 아버지 고종과 마찬가지로 기억력이 뛰어나 알현자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제국호텔 초대 주방장을 지낸 요시카와 가네요시 부자의 프랑스 요리를 좋아해 거의 매일 먹고 있었다.
1917년 6월에는 일본을 방문, 10년 전 방한한 다이쇼 천황을 알현하는 형식으로 재회했다.
11월에는 창덕궁 대부분이 소손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불에 탄 낙선재라는 건물로 옮겼으나 비좁았다.이완용은 이태왕이 사는 덕수궁으로 이전하는 방안도 검토됐으나 이를 들은 이완용은 천황이 내린 창덕궁이니 움직이지 않겠다며 이완용을 질책했고 이후 2년간 창덕궁 중수가 끝날 때까지 낙선재에서 살았다.
한반도는 일본에 노예화되었을까요?통상 정복당한 쪽의 왕족은 처형되거나 추방되는데...
미국 윌리엄 그리피스가 쓴 이씨조선 일제강점기 이전의 한반도가 보입니다.
서울로 호송된 네덜란드인 일행은 마치 구경거리의 야수 같았다.하얀 얼굴과 붉은 수염을 가진 이 외국인을 보러 군중이 몰려들었다.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잘 보이는 곳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모두가 네덜란드인이 물건을 마시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서양인들은 술을 마실 때 코를 귀보다 위로 잡아 올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사람에 비유되며 왕은 그 머리, 귀족은 몸통, 인민은 발이다.가슴과 배는 부풀어 오르는 반면 머리와 하지는 말라 있다.귀족은 그 강욕으로 인민의 생혈을 헹굴 뿐만 아니라 왕의 대권도 침범하고 있다. 나라는 충혈을 일으키고 관료주의의 부종을 앓고 있다. .
고문의 풍부함은 조선이 아직도 반문명국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법원과 감옥의 발명품으로는 쇠사슬, 등을 치기 위한 대나무, 엉덩이를 치기 위한 패들 모양의 기구, 살이 터질 때까지 종아리를 치기 위한 채찍, 고기와 내장을 괴롭히기 위한 밧줄, 손으로 쥐어주기, 지팡이, 그리고 무릎과 건넌방망이를 치기 위한 판 등이 있다.
결혼 후에는 여자와의 접촉이 불가능하다.여자는 거의 항상 안방에 틀어박혀 용서를 받지 않고 집 밖을 내다볼 수조차 없다.격리가 너무 엄격해서 외부인의 손가락이 닿았다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딸을, 남편은 아내를 죽이고 아내는 자살할 수 있다 .
조선의 건축은 극히 원시적인 상태에 있다.성곽, 요새, 사찰, 수도원 및 공공건축은 일본이나 중국의 장려함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이 나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 석조 유적이 거의 없다.주거지는 기와집이나 초가집으로 거의 예외 없이 단층집이다.소도시에서는 규칙적인 대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곳곳에 산재해 있다.대도시나 수도에서도 거리는 좁고 구불구불하다.
조선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문맹이다.아마 농민 계급의 남자 열 명 중 네 명이 중국어나 조선어를 읽을 수 있겠지만 여자도 계산에 넣으면 약 85%의 사람들은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다만 지역차는 크다.
조선에는 사무라이가 없다.일본에서 조선에 부족한 것은 심신이 잘 단련되고 병사인 동시에 학자이며 충성심과 애국심과 자기희생의 높은 이상을 내세우는 문화적 집단이다.
당시 한반도를 전한 저서는 여러 편이지만 내용은 공통적으로 양반의 횡포, 관료부패, 문화가 미개함을 전하고 있습니다.한국에서 전해지는 이씨조선만이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