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윌리엄 그리피스가 쓴 이씨조선 일제강점기 이전의 한반도가 보입니다.
2022-01-26
카테고리:이씨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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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그리피스가 쓴 이씨조선
서울로 호송된 네덜란드인 일행은 마치 구경거리의 야수 같았다.하얀 얼굴과 붉은 수염을 가진 이 외국인을 보러 군중이 몰려들었다.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잘 보이는 곳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모두가 네덜란드인이 물건을 마시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서양인들은 술을 마실 때 코를 귀보다 위로 잡아 올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사람에 비유되며 왕은 그 머리, 귀족은 몸통, 인민은 발이다.가슴과 배는 부풀어 오르는 반면 머리와 하지는 말라 있다.귀족은 그 강욕으로 인민의 생혈을 헹굴 뿐만 아니라 왕의 대권도 침범하고 있다. 나라는 충혈을 일으키고 관료주의의 부종을 앓고 있다. .
고문의 풍부함은 조선이 아직도 반문명국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법원과 감옥의 발명품으로는 쇠사슬, 등을 치기 위한 대나무, 엉덩이를 치기 위한 패들 모양의 기구, 살이 터질 때까지 종아리를 치기 위한 채찍, 고기와 내장을 괴롭히기 위한 밧줄, 손으로 쥐어주기, 지팡이, 그리고 무릎과 건넌방망이를 치기 위한 판 등이 있다.
결혼 후에는 여자와의 접촉이 불가능하다.여자는 거의 항상 안방에 틀어박혀 용서를 받지 않고 집 밖을 내다볼 수조차 없다.격리가 너무 엄격해서 외부인의 손가락이 닿았다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딸을, 남편은 아내를 죽이고 아내는 자살할 수 있다 .
조선의 건축은 극히 원시적인 상태에 있다.성곽, 요새, 사찰, 수도원 및 공공건축은 일본이나 중국의 장려함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이 나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 석조 유적이 거의 없다.주거지는 기와집이나 초가집으로 거의 예외 없이 단층집이다.소도시에서는 규칙적인 대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곳곳에 산재해 있다.대도시나 수도에서도 거리는 좁고 구불구불하다.
아울러 읽고 싶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ylow#조선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문맹이다.아마 농민 계급의 남자 열 명 중 네 명이 중국어나 조선어를 읽을 수 있겠지만 여자도 계산에 넣으면 약 85%의 사람들은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다만 지역차는 크다.
조선에는 사무라이가 없다.일본에서 조선에 부족한 것은 심신이 잘 단련되고 병사인 동시에 학자이며 충성심과 애국심과 자기희생의 높은 이상을 내세우는 문화적 집단이다.
POINT 당시 한반도를 전한 저서는 여러 편이지만 내용은 공통적으로 양반의 횡포, 관료부패, 문화가 미개함을 전하고 있습니다.한국에서 전해지는 이씨조선만이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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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한반도는 근대화에 필요한 기술이 아무것도 없었다.반수가 노비였던 나라
한반도에는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이사벨라바드의 조선기행
자력 근대화는 꿈의 별따기
화폐경제가 없었던 조선
아무일도 없었던 한반도
너무 판타지한 역사교육
1805년 유학자 정동요는 한반도에는 없었던 것으로서 양, 바퀴,바늘이라고 한다.바퀴는 나무를 변형해 가공하는 기술.바늘은 금속의 정밀 가공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이씨 조선시대 수공업은 전혀 발전하지 않고 전승도 되지 않아 중세 이전의 상태였습니다.
1894년부터 1897년까지 3년간 4차례 한반도를 여행한 이사벨라바드는 서울로 가는 길은 소가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가늘고 미로 같았다며 식별 가능한 정도의 통로일 뿐이라고 썼다.
가로 두 바퀴 차량이 없었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나무를 구부릴 기술이 없으니 통도 없었다.
한국은 일본이 수탈한 수탈했다고 하지만 수탈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은 공업용 기계를 제작하고 증기기관의 동력을 활용해 대량으로 상품을 제조한다.그리고 제품 판매에는 유통이 필요하다. 원자재나 상품을 운반하는 차, 원래 길이 있어야 한다.작업 공정의 전달이나 기록하기 위해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이씨조선에서는 양반 외 80%가 글을 읽지 못했다고 한다.
화폐 경제가 없으면 아무 거래도 할 수 없다.그리고 국민의 절반이 노비이다.유동적인 노동력이 없다면 누가 새로운 공장에서 일할 수 있을까.노비는 주인에게 노속되어 땅에 묶여 있던 . 즉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이 없었다.
당시 조선반도에는 산업혁명이나 근대화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없었다 .일본은 한일 병합기에 한반도에 산업기계, 자동차, 도로, 학교교육, 화폐경제, 신분제도 철폐 등을 도입했다.그로 인해 대량생산, 광역유통, 화폐와 상품의 교환경제, 유동적인 노동력을 창출하였다.그것이 한반도의 산업혁명과 근대화가 된다.
현재 한국은 모두 한국인이 만들고 일제강점기는 모든 것을 빼앗긴 암흑의 시대라고 교육받고 있다.역사인식이 다르기는커녕 정반대다.
바퀴를 만들지 못하고 어떻게 공업용 기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당시 산업기계는 증기기관의 동력을 큰 톱니바퀴가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반도 외발자전거 사진으로 보는 한일병합 전 한반도의 기술력과 지식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던 조선
효율이 오르지 않는 운반기술과 유통
조선에는 양과 차와 바늘이 없었다
한반도는 자력 근대화가 불가능했다
일본의 금속 가공,연마 기술은 세계 제일
대머리였던 한반도
이 사진은 옛날 한반도의 재미있는 놀이기구처럼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첫 번째 사진은 무려 한 바퀴의 대차에 사람을 태우고 이동하고 있다.
우스꽝스러움은 차치하고, 이것을 효율성이나 코스트의 시점에서 2번째의 사진과 비교하면 어떨까.두 번째는 일본의 인력거이지만, 어느 쪽도 근대적인 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차이점은 한 바퀴냐 두 바퀴냐 하는 것이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어 중국에서 수입하던 .수레바퀴는 값비싼 것이어서 양반이라지만 수레바퀴 하나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그 결과 가장 다른 점은 차를 움직이는 인원이다.한 바퀴의 경우 위에 사람이 타면 불안정해져 앞뒤로 2명 이상이 필요하다.두 바퀴의 경우 안정되기 위해 혼자 운용 가능하다.
바퀴보다 인간의 비용이 훨씬 저렴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아니면 인건비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일까.운반 효율이라는 점에서 생각하면 농사나 물건 운반에 대해서도 모든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 두 배의 인력이 필요하다면 생산효율이 올라갈 리 없다 . 양반조차 한 송이뿐이니 서민들은 바퀴조차 못 썼을 것이다.당시 조선시대를 기록한 서양인의 기록에는 한반도 사람들이 머리 위에 물건을 대량으로 올려놓고 나르고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씨 조선 말기에는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노비였다고 합니다.노비에게 그냥 명령하면 인건비는 들지 않아요.
조선시대 정동요라는 유생(실학자)이 쓴 책 에 따르면 조선에 없는 것으로 이라고 적고 있다.이씨 조선시대 바퀴를 만들기 위한 나무를 구부려 둥글게 가공하는 기술은 없었고 마차, 소달구지, 인력거, 농사용 물레방아가 없었다 .
이걸로 작업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바늘이 없다는 것은 금속 가공 기술이 현저히 낮았음을 나타낸다.
바늘을 만들려면 금속을 가늘고 끝을 뾰족하게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고 게다가 부러져서는 안 된다.그리고 뒷부분에 실을 통과시킬 수 있는 구멍을 가공할 필요가 있다.이씨 조선시대에 바퀴와 바늘은 중국에서 구했다.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도구가 없으면 만들 수 없다.그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다시 그 도구를 만들기 위한 도구가 필요하다.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가 없어도 한반도는 근대화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수레바퀴조차 만들지 못한다면 산업혁명이 가능할 리 없다.어떻게 증기기관을 이용한 거대한 산업기계를 만들까.
일본의 산업혁명은 1,000년을 넘어 전승된 장인기술을 바탕으로 가능해졌다 .서양에서 배운 생산설비와 철도 등을 가식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일본에서는 특히 현재에도 다양한 세계특허를 갖는 전제기술로서 연마기술이나 금속가공기술이 있다.그 이유는 일본에서는 칼 문화가 오래 지속되어 대장간이 금속을 가공하는 전통 기술을 오래 전승하고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반도는 겨울에는 춥고 따뜻해지기 위해 산에서 나무를 베지만 무작정 베었기 때문에 일본이 왔을 때는 나무도 나지 않은 민둥산뿐이었다.나무가 없는 산에 비가 오면 곧 많은 양의 물이 밀려들어 밭을 침수하고 농작물은 빈번히 괴멸하였다.
일본은 한반도의 산들에 차례차례 식림을 해 나갔다.그 수는 1911년부터 10년간 10억개 에 이른다.이는 산업혁명에서의 기술발전과는 무관한 문제다.이는 노동의 효율화와 계획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씨 조선시대는 국민의 노비화로 인해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아 기술의 전승이나 지식이 끊긴 상태였다.
한일병합으로 일본에 수탈당했다고 한국은 외치지만, 일본이 갔을 때 한반도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김옥균 한국서 평가 안 받아 - 한국 대통령은 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안하나
왜 한국에서 김옥균이 평가받지 못하는지 궁금하다.적어도 일본에서의 평가와는 정반대의 평가다.사흘 천하란 그를 야유하는 말일까.분명 이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너무나 부주의한 쿠데타였다고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김옥균보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 훨씬 영웅인 듯하다.
일본은 유색인종 국가로 유일하게 산업혁명 및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다.김옥균은 이에 착안해 한반도의 근대화를 지향했다.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 근대화의 핵심을 담당한 사람들과 교류를 심화시켰다.
김옥균이 주창한 삼화주의란 일본 한반도 중국이 서로 독립을 유지하고 협력해 서양의 식민지 정책에 맞서자는 것이다.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지향하는 길과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중국의 신해혁명을 지탱한 미야자키 도도천은 김옥균이 한반도의 손문이 되는 인물이었다고 칭했다 .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암살된 뒤 시신은 한반도로 돌려보낸다.두 번째 처형을 당하기 위해서다.토막토막 절단된 시신은 한반도 전역에 노출됐다.
예전에 한국인에게 왜 김옥균은 평가받지 못하냐고 물었을 때 김옥균은 시대를 잘못 보고 실패한 인물이라고 했다.참살당했으니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뜻이다.귀를 의심하는 발언이었다.
김옥균은 민비에 의해 보낸 자객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당합니다.김옥균을 상해로 불러들인 것은 바로 김옥균의 친구였습니다.
김옥균 참살 소식은 일본 내를 분노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장례식이 거행된 아사쿠사 히가시혼간지에서는 '청나라를 혼내라!청나라를 쓰러뜨려라!'의 대합창이 되었다고 한다.
그 반년도 지나지 않아 동학당의 난이 일어나 천진조약을 어긴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裕吉)는 김옥균(金玉均)을 귀여워하며 여러 차례 사저로 초청했다.그러나 한반도 자립근대화의 목표를 보고 탈아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결과는 일본이 청나라를 쓰러뜨리고 한반도는 독립국가가 되었다.고인이 된 김옥균의 사이였던 서재필에 의해 그 기쁨을 표현한 독립문이 현재의 서울에 건설되었다.독립문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한 것이지만, 일제로부터의 독립의 상징이라고 한국에서는 믿고 있다.현재 김옥균의 묘소는 일본 아오야마 영원에 놓여 있다.
참살당했으니 패자일까.나라를 위해 진실된 행동을 한 인간만이 후세에 그 길을 맡길 수 있다.대동아전쟁에 지원한 한반도 병사들도 마찬가지다.그들은 일본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다.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싸웠을 것이다.
당시 한반도 근대화를 뒷받침했던 사람들도 매국노처럼 취급된다.이런 진실의 발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한국은 정말 싫어하는 것 같다.
대동아전쟁에서 순사한 한반도 병사들이 잠든 야스쿠니 신사에 우리 대통령이 참배하지 않는 것은 이 또한 이상할 일이 아니다.한국은 진정한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싸운 병사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옛 일본군에 종군하다 전사한 조선인 병사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습니다.한국 대통령이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는 일은 없습니다.
북방민족의 침략을 계속 받은 중국과 반도의 역사. 반도는 끝내 독립을 유지하지 못했다
한반도는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중국 대륙이 쏙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입니다.그래서 중국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심은 도대체 무엇일까요?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에 대한 역사적인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인 이유가 커 보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인 대륙에서의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봅시다.한반도에는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고고학상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진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으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전설상의 기자조선은 중국의 은나라 기자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위씨 조선은 중국 연나라의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습니다.포인트는 전설상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중국의 속국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후에도 중국의 침공을 계속 받는 조선.이후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고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고구려가 승리한 후 수나라, 그 후에는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게 됩니다.이후 반도에서는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지만 건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대륙 당나라의 책봉하에 놓이게 됩니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서 역시 속국이 됩니다.
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번의 일본 침공을 실시하여 실패했습니다.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은 만주지역에 있던 민족이었고,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나라 왕조를 열었습니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보면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자리잡았습니다.북방민족의 대부분은 유목민족으로서 생활을 주로 했지만,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인 관계상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匈놈,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에게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역사상의 대부분을 한민족이 아닌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습니다.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설명한 것을 볼 수는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계속 받아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입니다.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도 당나라도 원나라도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봤을 때도 이민족 국가입니다.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대륙 지배를 거쳐 그 이민족에 의한 중국대륙의 왕조가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한반도가 주변 이민족에게 침략당한 횟수는 크고 작은 것을 포함하여 무려 960회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일합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이라는 주변 이민족 국가의 지배를 받은 것이 됩니다.한반도에 있어서 자신들은 중국 대륙과 연결된 존재이며, 작은 중국, 소중화를 자칭하고, 일본은 그 바깥의 나라라는 감각이며, 그 중국을 중심으로 한 우월의식이 역사적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즉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에 의한 국가건설, 독립국가로서의 개념을 유사 이래 가져오지 않았다.가질 기회도 의사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이 한반도를 독립국가로 삼은 후에도 그 의식은 싹트지 못하고 자력국가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러시아에 이권을 차례로 팔아갔습니다.그리고 보다 못한 일본은 한반도의 자주독립 지원을 포기하고 1910년 한일합방을 실시합니다.한국은 한반도의 독립을 일본이 빼앗았다고 하는데, 한반도가 독립국가가 된 것은 청일전쟁의 시모노세키 조약, 즉 일본에 의한 것입니다.그 뒤에 자립독립 의식을 제대로 가져준다면 병합할 필요도 없었다.라는 것이 일본의 본심이겠지요.
샤를 다래의 조선 사정으로 보는 한반도 문화 미개였던 이씨 조선시대
프랑스 선교사들의 통신을 정리한 샤를 다레의 '조선 사정' 발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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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국에서는 도로와 운수 기관이 실로 부족하여 그것이 대규모 경작을 방해하고 있다.사람들은 각자의 집 주위나 가까운 곳을 경작할 뿐이다.또한 대부분의 부락은 거의 없고 시골 사람들은 서너 채, 많게는 열두 세 채씩 뭉쳐 흩어져 있다.연간 수확은 주민들의 수요를 겨우 충족시키는 정도이며, 더구나 조선에서는 기근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1637년에 체결된 조약은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실제 예속 조건을 가중시키지는 않았지만 형식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굴욕적인 종속 관계가 되었다.조선 국왕은 청국황제에 대해 단순히 서임권을 인정할 뿐 아니라 신분상 직접적인 권한, 즉 주종(군신) 관계까지 승인해야 했다.
서울은 산줄기로 둘러싸여 한강의 흐름을 따라 위치해 높고 두꺼운 성벽에 둘러싸인 인구가 많은 대도시이지만 건축물에는 볼 것이 없다. 꽤 넓은 몇 개의 도로를 제외하고는 굽이굽이 골목만 있고, 이 골목에는 공기도 흐르지 않고 발에 걸리는 것이라고는 쓰레기뿐이다.집은 보통 기와로 덮여 있지만 낮고 좁다.
관리의 지위는 공공연히 매매되고, 그것을 산 사람은 당연히 그 비용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체면을 구하려 들지도 않는다.위로는 도지사부터 가장 하급의 소관료에 이르기까지 징세와 소송 및 기타 모든 기회를 이용해 각 관리는 돈을 번다.국왕의 어사조차 극도의 파렴치함으로 그 특권을 남용하고 있다.
조선의 학문은 전혀 민족적인 것이 아니다.읽는 책은 중국 것이고 배우는 말은 조선어가 아니라 한자어이며 역사에 관해서도 조선사가 아닌 중국사를 연구하고 대학자들이 신봉하고 있는 철학체계는 중국 것이다.사본은 항상 원본보다 떨어지기 때문에 조선 학자들이 중국 학자들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지난날의 일은 차치하고 오늘날 공개시험[과거]이 극도로 타락했음은 확실하다.오늘날에는 가장 학식 있고 가장 유능한 사람에게 학위 면허장이 수여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나 가장 강력한 보호자가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조선의 귀족계급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오만하다.다른 나라에서는 군주 사법관 단체들이 귀족계급을 본래의 범위 안에 두고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조선에서는 양반 인구가 많고 내부적으로는 대립하고 있음에도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단결하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상민도 관리도 국왕도 그들의 권력에 대항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에서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풍속은 심히 부패되어 있으며, 그 필연적인 결과로 여성의 일반적인 지위는 불쾌할 정도로 비참하고 낮은 상태에 있다.여성은 남성의 반려자로서가 아니라 노예 혹은 위안거리 혹은 노동력일 뿐이다.
조선인은 일반적으로 고집이 세고 까다로우며 화를 잘 내고 집념이 많다.그것은 미개성 탓이다.이교도들 사이에는 아무런 윤리교육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도 교육이 그 성과를 나타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아이들은 거의 징벌을 받지 않고 성장하고, 성장한 후에는 남자나 여자나 볼품없을 정도의 분노를 끊임없이 터뜨리게 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는 대체로 매우 약하고, 그들은 중대한 위기가 있다고만 보면 무기를 포기하고 사방으로 도망갈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아마도 그것은 훈련 부족이거나 조직의 결함 때문일 것이다.유능한 장성만 있으면 조선인은 훌륭한 군대가 될 것이라고 선교사들은 확신한다.
조선인은 돈벌이에 사족을 못 쓴다.돈을 벌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다.그들은 재산을 보호하고 도난을 막는 도덕적 법을 거의 알지 못하며 하물며 준수하려 하지 않는다.일반적으로 이들은 욕심이 많은 동시에 낭비도 많아 돈을 가지면 남김없이 써버린다.
조선인은 폭식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양반도, 상민도 모두 차이가 없다.많이 먹는 것은 명예롭고 회식자에게 나오는 식사 값어치는 질이 아니라 양으로 따진다.따라서 식사 중에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한마디로 음식의 한 입 두 입을 잃기 때문이다.그리고 배에 탄력성을 확실히 주도록 어릴 때부터 배려하고 키울 수 있다.엄마들은 어린 아이를 무릎 위에 안고 밥이나 기타 영양물을 먹이고 가끔 수저로 배를 두드려 충분히 배가 불었는지 본다.더 이상 부풀리는 것이 생리적으로 불가능해졌을 때 먹이는 것을 그만둔다.
의복은 흰옷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러나 청결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은 매우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짙은 때 때문에 색이 변하고 있다.불결은 조선인의 큰 결함으로 부유한 사람들도 종종 벌레가 붙어 찢어진 채로 옷을 입는다.
조선인들은 과학연구 분야에서 거의 진보의 흔적을 보이지 않지만 산업지식에 있어서는 더욱 뒤처져 있다.이 나라에서는 수세기 동안 유용한 기술이 전혀 진보하지 않았다.
상업 발달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 중 하나로 불완전한 화폐제도가 있다.금화나 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이 금속들을 덩어리로 만들어 파는 것은 많은 세부 규칙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예를 들어 중국의 은을 조선의 은과 같은 막대 모양으로 주조해서 팔아서도 안 된다.반드시 간파되고 몽둥이 은 몰수된 데다 그 상인은 무거운 벌금을 물게 되어 아마 매형에 처해질 것이다.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유일한 통화는 동전이다.
상거래의 또 다른 장애물은 교통로의 비참한 상태다.항행이 가능한 하천은 매우 적고 단지 몇 개의 하천만이 배를 통과하는데, 그것도 극히 제한된 구역의 항행이 허용되고 있을 뿐이다.이 나라는 산악과 협곡이 많은데도 도로를 만드는 기술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따라서 거의 모든 운반이 소나 말 혹은 사람의 등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자신의 보유를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믿는 이 쇄국을 세심하게 고수하고 있으며 어떤 이해나 인도적 고려를 통해서도 이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1871년, 1872년 동안 놀라운 기근이 조선을 덮쳐 국토는 황폐해졌다.너무 심해 서해안 사람들 중에는 딸을 중국인 밀무역자에게 1인당 쌀 한 되에 파는 사람도 있었다.
북쪽 국경 숲을 넘어 요동에 이른 몇몇 조선인들은 끔찍한 국상을 그림으로 그려 선교사들에게 보여주며 어느 길에나 시체가 널려 있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