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한국서 평가 안 받아 - 한국 대통령은 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안하나
2022-02-09
카테고리:이씨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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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평가받지 못하는 김옥균
왜 한국에서 김옥균이 평가받지 못하는지 궁금하다.적어도 일본에서의 평가와는 정반대의 평가다.사흘 천하란 그를 야유하는 말일까.분명 이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너무나 부주의한 쿠데타였다고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김옥균보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 훨씬 영웅인 듯하다.
일본형 근대화를 목표로 한 김옥균
일본은 유색인종 국가로 유일하게 산업혁명 및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다.김옥균은 이에 착안해 한반도의 근대화를 지향했다.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 근대화의 핵심을 담당한 사람들과 교류를 심화시켰다.
동아시아의 독립자존을 주창한 삼화주의
김옥균이 주창한 삼화주의란 일본 한반도 중국이 서로 독립을 유지하고 협력해 서양의 식민지 정책에 맞서자는 것이다.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지향하는 길과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중국의 신해혁명을 지탱한 미야자키 도도천은 김옥균이 한반도의 손문이 되는 인물이었다고 칭했다 .
암살당해 실패한 인물이라는 평가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암살된 뒤 시신은 한반도로 돌려보낸다.두 번째 처형을 당하기 위해서다.토막토막 절단된 시신은 한반도 전역에 노출됐다.
아울러 읽고 싶다
노관파천으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다 - 주권을 포기했는데 일본에 빼앗겼다고 한다
독립국이 되었는데 포기한 한반도
국가원수가 타국 공사관으로 도망치다
국제적으로 주권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 한반도
국가원수 망명하면 끝.이것이 국제 상식
고종에게 기회를 준 일본
로관파천은 조선왕조가 주권을 포기한 사건이다.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조선이 독립국가가 된 지 불과 1년 만이다.이범진·이학균 등에 의한 춘생문 사건이 발생.고종을 빼앗아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내통으로 실패하였다.
여기에 미러공사관이 관여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지만 궁녀가 일본이 국왕을 폐위하려 하니 매우 위험하다는 서장을 고종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사실상의 연금 상태가 된다.공사관으로부터의 원격 통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며 대원군파 숙청 등을 지시하고 있다.그 밖에 집정을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기간에 러시아, 미국 등은 한반도 내의 이권을 차례로 챙겨갔다.
조선왕조는 국가원수가 나라에서 도망치는 실수를 벌여 이미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조선왕조는 주권국가가 아니게 된 것으로 국제사회에서는 인지되고 있다.
이후 제1차 러일의정서(小村·ウェーーバーー協定書), 제2차 러일의정서(山縣·로바노프 협정)가 체결되었고, 그 전제에서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제국의 이름을 국호에 붙이는 것은 일본이나 중국과 동격이라는 의미를 포함하지만 일본은 이를 승인하고 있다.
이는 러일전쟁 전날 밤의 사건으로 러시아가 한반도 이권을 챙기는 움직임이 가속화됐다.그리고 가쓰라·태프트 협정은 러일전쟁 후에 대해 미국과의 교통정리를 실시한 것이 된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주장하기 위해 밀사를 보냈고, 회의장에조차 들어가지 못해 국제적으로 부정당한 사건이 된다.
한일병합으로대한제국을일본이강권적으로병합한것처럼한국은말하지만그전에국가로서의체를이루지않았습니다
기억에 새로운 것은 아프가니스탄이다.아슈라프 가니는 대통령으로서 국외로 도피 망명한 셈인데, 어느 나라가 그 후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정부를 정당한 정부로 인정했을까.
그 순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제압했다.
한반도의 경우 고종이 다시 집정을 하는 것이 허용되어 일제의 보호 아래 대한제국을 건국한 것이다.그리고 역시 국가로서의 체통을 이루지 못하고 한일병합으로 가는 것이다.
예전에 한국인에게 왜 김옥균은 평가받지 못하냐고 물었을 때 김옥균은 시대를 잘못 보고 실패한 인물이라고 했다.참살당했으니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뜻이다.귀를 의심하는 발언이었다.
MEMO 김옥균은 민비에 의해 보낸 자객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당합니다.김옥균을 상해로 불러들인 것은 바로 김옥균의 친구였습니다.
김옥균 참살에 격분한 것은 일본인
김옥균 참살 소식은 일본 내를 분노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장례식이 거행된 아사쿠사 히가시혼간지에서는 '청나라를 혼내라!청나라를 쓰러뜨려라!'의 대합창이 되었다고 한다.
그 반년도 지나지 않아 동학당의 난이 일어나 천진조약을 어긴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裕吉)는 김옥균(金玉均)을 귀여워하며 여러 차례 사저로 초청했다.그러나 한반도 자립근대화의 목표를 보고 탈아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청일전쟁 후 독립국이 된 조선
결과는 일본이 청나라를 쓰러뜨리고 한반도는 독립국가가 되었다.고인이 된 김옥균의 사이였던 서재필에 의해 그 기쁨을 표현한 독립문이 현재의 서울에 건설되었다.독립문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한 것이지만, 일제로부터의 독립의 상징이라고 한국에서는 믿고 있다.현재 김옥균의 묘소는 일본 아오야마 영원에 놓여 있다.
일본에 관련된 사람들을 털고 싫어하는 한국
참살당했으니 패자일까.나라를 위해 진실된 행동을 한 인간만이 후세에 그 길을 맡길 수 있다.대동아전쟁에 지원한 한반도 병사들도 마찬가지다.그들은 일본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다.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싸웠을 것이다.
당시 한반도 근대화를 뒷받침했던 사람들도 매국노처럼 취급된다.이런 진실의 발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한국은 정말 싫어하는 것 같다.
대동아전쟁에서 순사한 한반도 병사들이 잠든 야스쿠니 신사에 우리 대통령이 참배하지 않는 것은 이 또한 이상할 일이 아니다.한국은 진정한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싸운 병사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POINT 옛 일본군에 종군하다 전사한 조선인 병사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습니다.한국 대통령이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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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이씨 조선시대의 경제 화폐경제 도입한 것은 일본 대한제국 중앙은행은 일본 제일은행
조선반도에서는 화폐경제가 발전하지 않았다
통화를 양산하고 반복되는 인플레이션
화폐경제가 없으면 자본주의는 없다
차관도입과 일본은행이 세관을 주관한다
지난 두 차례 외환위기도 일본이 구제
이씨 조선 초기에는 전매품 소금과 천과 쌀, 잡곡으로 한정된 교환이었다.이후 삼베·면포·쌀 등을 현물 화폐로 거래되었다.1401년 저화를 발행하여 통용을 장려하였으나 보급되지 못하였다.
1423년에는 조선통보라는 동전, 1464년에는 전폐가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국가의 수세에 사용될 목적으로 쓰이지 일반 사회에 유통되는 것이 아니었다.1678년 상평통보를 주조하였다.
이 화폐는 약 2세기에 걸쳐 발행되었지만 각 관청에서 주조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1866년 대원군은 재정 살리기와 경복궁 개축을 위해 당백전을 주조하였다.
재정을 살리기는커녕 양산하는 바람에 화폐 가치는 폭락해 1868년 통용이 금지됐다.1883년에는 당오전을 발행해도 화폐가치는 곧바로 급락해 1895년 통용이 금지됐다.1892년부터 백동화를 발행하였는데, 금본위 체제에서 보조화폐로 사용되었다.
즉 한반도 경제는 물물교환이 기본이다.노비 매매도 노비 5명과 소 1마리와 교환되고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한반도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시켰다.세관은 일본의 제일은행에 귀속되어 관세 징수를 일본 화폐로 실시했다.화폐정리사업의 자금은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으로 이루어졌으며, 일본의 제일은행이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이 되었다.
화폐경제가 없다면 자본주의 경제는 있을 수 없다.한반도의 근대화 및 화폐 경제, 자본의 유통 등 시장 정비를 일본이 실시하였다.지금도 한국이 국외와 거래할 때 외상구매금 신용장은 일본 사은행이 발행하고 있다.이 신용장이 없으면 한국 기업은 국제 거래를 할 수 없다.
1997년, 2008년 한국의 외환위기 때도 일본은 구제에 나섰다.한국 경제의 근간인 통화 자체가 일본이 신용을 주고 있는 것이다.이씨 조선시대처럼 무작정 통화를 발행해 괴멸적인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10년 동안 두 번이나 외환위기를 맞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원화는 여전히 취약하다.이것이 한반도의 현재에 이르는 통화의 역사이다.
봉건제와 근대화의 관계 조선 왕조에는 산업 혁명에 필요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없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산업혁명을 성공시킬 수 없다.산업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무산자 계급), 즉 노동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유신군이 쇄국정책의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면서 지향한 것은 개국은 물론 봉건제도 탈피이자 막번체제 파괴다.즉 사람들이 봉건제 안에 있어 토지에 묶여 있는 이상 유동적인 노동력을 확보할 수 없다.
새로운 산업 발전에 있어서도 필요한 인재가 필요한 장소에 모일 수 없다.메이지 유신으로 발생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토지에 얽매이지 않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이 있다.
당시 한반도를 볼 때 봉건제는커녕 노비제였고 그것은 중세 사회의 것이다.더구나 내실을 따졌을 때 중세기에 발전할 만한 것이 일절 발전하지 않아 그 사회는 중세 이전의 상태였다고 한다.
이처럼 노비가 땅에 묶여 주인에게 얽매이고 자유도 없다면 산업발전을 지탱할 노동력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구래의 봉건적 사회체제의 타파는 불가결하게 된다.메이지유신이 그랬고 신해혁명은 청나라를 탈피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이유로 근대화를 목표로 노비제도 폐지를 목표로 한 김옥균의 생각은 옳은 것이다.조선왕조를 무너뜨려야 근본적인 사회개혁이 가능하고 근대화의 길은 거기서 비롯된다.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빼앗았다는 새빨간 거짓말-이씨 조선은 자립적 국가가 아니었다.
국내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조선왕조
한일병합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이 없어지면서 남북으로 분열
현재도 계속되는 분열체질
이씨 조선 말기 조선왕조는 국내를 통치할 힘이 없었음이 분명하다.임오군란을 누가 거두었는가 하면 원세개이다.동학당의 난을 억누르기 위해 민비는 누구에게 의지했을까.이것도 청나라다.이로써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청일전쟁 이후 독립국이 된 후에는 어떨까.다음은 친러파와 친일파의 분열이다.이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순송은 칙유로 국내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일본 천황 폐하에게 나라를 맡기고 싶다고 적고 있다.일본과 한반도는 조약에 의해 병합된 것이다.일본군이 쳐들어왔다지만 그런 사실은 전혀 없다.한반도가 당시 자율적인 국가였다는 근거는 무엇일까.애초 자율적인 국가였다면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마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패전 이후 한반도는 어떻게 됐을까.무려 남북으로 분열된 것이다.일제가 떠났다고 하면서 친러, 친중세력과 친미세력에 의해 나라가 분열된 것이다.
현재의 한국을 볼 때 어떻게 될까.이 역시 친중파와 친미파의 분열 구도다.더구나 문재인지난 정권에서는 적국인 북한과 중국 주도의 통일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외교정책을 폈던 것이다.역사를 통해 한반도는 이는 일본인의 시선으로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한반도가 안정적이었던 것은 일제 강점기라고 할 수 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자 외교 - 밀사는 왜 무시당했지?주권을 포기한 조선을 세계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
러일전쟁 전 대한제국 건국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돕고 결국 외교권을 박탈
헤이그 밀사 사건은 한심한 외교 실패
주요 밀사의 활동
헤이그 밀사사건 이전에 이미 주권포기
러시아 이권의 남하가 러일전쟁의 원인
국가원수가 도망쳐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하는 실수를 벌인 고종은 제1차 러일의정서(고촌 베버협정), 제2차 러일의정서(산현 로바노프협정)가 체결되고 그 전제 아래 경운궁으로 돌아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제국의 이름을 국호에 붙이는 것은 일본 중국과 동격이라는 뜻이었으나 일본은 이를 승인했다.
이후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 중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1905년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에 따라 한반도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러일의정서에 의해 러시아와의 이야기를 붙여 일본은 일본과 동격인 대한제국의 건국을 도왔음에도 고종이 러시아 이권을 끌어들이게 된다.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외교권 회복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이 1907년 헤이그 국제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현재 행해지고 있는 고자 외교와 같은 일을 당시에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했을 러시아가 배신하고 참가국 모두에게 거절당했고 고종이 보낸 밀사는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관할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장이 되었다.
[주요 밀사 활동]
회의 의장을 맡고 있는 러시아 제국 주석 대표 네리도프 백작을 방문하지만 면회를 거절당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각국 대표를 방문하지만 지원을 거부당한다.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부 장관에게 면회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의 회의는 일본의 한반도 관할권을 인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애초 민비암살이나 춘생문 사건을 거쳐 국가원수인 고송이 1896년 하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망명했다(노관파천).이 시점에서 세계로부터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로 이미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본덕분에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조선은 주권을 포기한 것이다 .
망명지에서 원격통치 같은 것을 하려 해도 이미 러시아의 연금 상태여서 차례차례 러시아는 한반도의 이권을 챙기게 됐다.고종이 조선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건국한 후에도 러시아는 한반도 이권을 계속 챙겼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러일전쟁이다.
이씨조선은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청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겼고, 로관파천으로 러시아 이권에 침식되어 러일전쟁에 이르게 됩니다.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에 불복하여 밀사를 보낸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입니다.그 후 일본은 한반도의 독립을 포기하게 됩니다.
한반도 외발자전거 사진으로 보는 한일병합 전 한반도의 기술력과 지식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던 조선
효율이 오르지 않는 운반기술과 유통
조선에는 양과 차와 바늘이 없었다
한반도는 자력 근대화가 불가능했다
일본의 금속 가공,연마 기술은 세계 제일
대머리였던 한반도
이 사진은 옛날 한반도의 재미있는 놀이기구처럼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첫 번째 사진은 무려 한 바퀴의 대차에 사람을 태우고 이동하고 있다.
우스꽝스러움은 차치하고, 이것을 효율성이나 코스트의 시점에서 2번째의 사진과 비교하면 어떨까.두 번째는 일본의 인력거이지만, 어느 쪽도 근대적인 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차이점은 한 바퀴냐 두 바퀴냐 하는 것이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어 중국에서 수입하던 .수레바퀴는 값비싼 것이어서 양반이라지만 수레바퀴 하나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그 결과 가장 다른 점은 차를 움직이는 인원이다.한 바퀴의 경우 위에 사람이 타면 불안정해져 앞뒤로 2명 이상이 필요하다.두 바퀴의 경우 안정되기 위해 혼자 운용 가능하다.
바퀴보다 인간의 비용이 훨씬 저렴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아니면 인건비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일까.운반 효율이라는 점에서 생각하면 농사나 물건 운반에 대해서도 모든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 두 배의 인력이 필요하다면 생산효율이 올라갈 리 없다 . 양반조차 한 송이뿐이니 서민들은 바퀴조차 못 썼을 것이다.당시 조선시대를 기록한 서양인의 기록에는 한반도 사람들이 머리 위에 물건을 대량으로 올려놓고 나르고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씨 조선 말기에는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노비였다고 합니다.노비에게 그냥 명령하면 인건비는 들지 않아요.
조선시대 정동요라는 유생(실학자)이 쓴 책 에 따르면 조선에 없는 것으로 이라고 적고 있다.이씨 조선시대 바퀴를 만들기 위한 나무를 구부려 둥글게 가공하는 기술은 없었고 마차, 소달구지, 인력거, 농사용 물레방아가 없었다 .
이걸로 작업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바늘이 없다는 것은 금속 가공 기술이 현저히 낮았음을 나타낸다.
바늘을 만들려면 금속을 가늘고 끝을 뾰족하게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고 게다가 부러져서는 안 된다.그리고 뒷부분에 실을 통과시킬 수 있는 구멍을 가공할 필요가 있다.이씨 조선시대에 바퀴와 바늘은 중국에서 구했다.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도구가 없으면 만들 수 없다.그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다시 그 도구를 만들기 위한 도구가 필요하다.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가 없어도 한반도는 근대화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수레바퀴조차 만들지 못한다면 산업혁명이 가능할 리 없다.어떻게 증기기관을 이용한 거대한 산업기계를 만들까.
일본의 산업혁명은 1,000년을 넘어 전승된 장인기술을 바탕으로 가능해졌다 .서양에서 배운 생산설비와 철도 등을 가식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일본에서는 특히 현재에도 다양한 세계특허를 갖는 전제기술로서 연마기술이나 금속가공기술이 있다.그 이유는 일본에서는 칼 문화가 오래 지속되어 대장간이 금속을 가공하는 전통 기술을 오래 전승하고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반도는 겨울에는 춥고 따뜻해지기 위해 산에서 나무를 베지만 무작정 베었기 때문에 일본이 왔을 때는 나무도 나지 않은 민둥산뿐이었다.나무가 없는 산에 비가 오면 곧 많은 양의 물이 밀려들어 밭을 침수하고 농작물은 빈번히 괴멸하였다.
일본은 한반도의 산들에 차례차례 식림을 해 나갔다.그 수는 1911년부터 10년간 10억개 에 이른다.이는 산업혁명에서의 기술발전과는 무관한 문제다.이는 노동의 효율화와 계획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씨 조선시대는 국민의 노비화로 인해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아 기술의 전승이나 지식이 끊긴 상태였다.
한일병합으로 일본에 수탈당했다고 한국은 외치지만, 일본이 갔을 때 한반도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