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관파천으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다 - 주권을 포기했는데 일본에 빼앗겼다고 한다
2021-11-15
카테고리:이씨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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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국이 되었는데 포기한 한반도
로관파천은 조선왕조가 주권을 포기한 사건이다.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조선이 독립국가가 된 지 불과 1년 만이다.이범진·이학균 등에 의한 춘생문 사건이 발생.고종을 빼앗아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내통으로 실패하였다.
여기에 미러공사관이 관여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지만 궁녀가 일본이 국왕을 폐위하려 하니 매우 위험하다는 서장을 고종에게 전달했다.
아울러 읽고 싶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원수가 타국 공사관으로 도망치다
그리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사실상의 연금 상태가 된다.공사관으로부터의 원격 통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며 대원군파 숙청 등을 지시하고 있다.그 밖에 집정을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기간에 러시아, 미국 등은 한반도 내의 이권을 차례로 챙겨갔다.
MEMO 조선왕조는 국가원수가 나라에서 도망치는 실수를 벌여 이미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국제적으로 주권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 한반도
이 시점에서 조선왕조는 주권국가가 아니게 된 것으로 국제사회에서는 인지되고 있다.
이후 제1차 러일의정서(小村·ウェーーバーー協定書), 제2차 러일의정서(山縣·로바노프 협정)가 체결되었고, 그 전제에서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제국의 이름을 국호에 붙이는 것은 일본이나 중국과 동격이라는 의미를 포함하지만 일본은 이를 승인하고 있다.
이는 러일전쟁 전날 밤의 사건으로 러시아가 한반도 이권을 챙기는 움직임이 가속화됐다.그리고 가쓰라·태프트 협정은 러일전쟁 후에 대해 미국과의 교통정리를 실시한 것이 된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주장하기 위해 밀사를 보냈고, 회의장에조차 들어가지 못해 국제적으로 부정당한 사건이 된다.
아울러 읽고 싶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자 외교 - 밀사는 왜 무시당했지?주권을 포기한 조선을 세계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
러일전쟁 전 대한제국 건국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돕고 결국 외교권을 박탈
헤이그 밀사 사건은 한심한 외교 실패
주요 밀사의 활동
헤이그 밀사사건 이전에 이미 주권포기
러시아 이권의 남하가 러일전쟁의 원인
국가원수가 도망쳐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하는 실수를 벌인 고종은 제1차 러일의정서(고촌 베버협정), 제2차 러일의정서(산현 로바노프협정)가 체결되고 그 전제 아래 경운궁으로 돌아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제국의 이름을 국호에 붙이는 것은 일본 중국과 동격이라는 뜻이었으나 일본은 이를 승인했다.
이후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 중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1905년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에 따라 한반도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러일의정서에 의해 러시아와의 이야기를 붙여 일본은 일본과 동격인 대한제국의 건국을 도왔음에도 고종이 러시아 이권을 끌어들이게 된다.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외교권 회복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이 1907년 헤이그 국제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현재 행해지고 있는 고자 외교와 같은 일을 당시에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했을 러시아가 배신하고 참가국 모두에게 거절당했고 고종이 보낸 밀사는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관할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장이 되었다.
[주요 밀사 활동]
회의 의장을 맡고 있는 러시아 제국 주석 대표 네리도프 백작을 방문하지만 면회를 거절당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각국 대표를 방문하지만 지원을 거부당한다.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부 장관에게 면회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의 회의는 일본의 한반도 관할권을 인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애초 민비암살이나 춘생문 사건을 거쳐 국가원수인 고송이 1896년 하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망명했다(노관파천).이 시점에서 세계로부터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로 이미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본덕분에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조선은 주권을 포기한 것이다 .
망명지에서 원격통치 같은 것을 하려 해도 이미 러시아의 연금 상태여서 차례차례 러시아는 한반도의 이권을 챙기게 됐다.고종이 조선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건국한 후에도 러시아는 한반도 이권을 계속 챙겼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러일전쟁이다.
이씨조선은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청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겼고, 로관파천으로 러시아 이권에 침식되어 러일전쟁에 이르게 됩니다.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에 불복하여 밀사를 보낸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입니다.그 후 일본은 한반도의 독립을 포기하게 됩니다.
POINT 한일병합으로대한제국을일본이강권적으로병합한것처럼한국은말하지만그전에국가로서의체를이루지않았습니다
국가원수 망명하면 끝.이것이 국제 상식
기억에 새로운 것은 아프가니스탄이다.아슈라프 가니는 대통령으로서 국외로 도피 망명한 셈인데, 어느 나라가 그 후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정부를 정당한 정부로 인정했을까.
그 순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제압했다.
고종에게 기회를 준 일본
한반도의 경우 고종이 다시 집정을 하는 것이 허용되어 일제의 보호 아래 대한제국을 건국한 것이다.그리고 역시 국가로서의 체통을 이루지 못하고 한일병합으로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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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한반도는 근대화에 필요한 기술이 아무것도 없었다.반수가 노비였던 나라
한반도에는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이사벨라바드의 조선기행
자력 근대화는 꿈의 별따기
화폐경제가 없었던 조선
아무일도 없었던 한반도
너무 판타지한 역사교육
1805년 유학자 정동요는 한반도에는 없었던 것으로서 양, 바퀴,바늘이라고 한다.바퀴는 나무를 변형해 가공하는 기술.바늘은 금속의 정밀 가공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이씨 조선시대 수공업은 전혀 발전하지 않고 전승도 되지 않아 중세 이전의 상태였습니다.
1894년부터 1897년까지 3년간 4차례 한반도를 여행한 이사벨라바드는 서울로 가는 길은 소가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가늘고 미로 같았다며 식별 가능한 정도의 통로일 뿐이라고 썼다.
가로 두 바퀴 차량이 없었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나무를 구부릴 기술이 없으니 통도 없었다.
한국은 일본이 수탈한 수탈했다고 하지만 수탈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은 공업용 기계를 제작하고 증기기관의 동력을 활용해 대량으로 상품을 제조한다.그리고 제품 판매에는 유통이 필요하다. 원자재나 상품을 운반하는 차, 원래 길이 있어야 한다.작업 공정의 전달이나 기록하기 위해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이씨조선에서는 양반 외 80%가 글을 읽지 못했다고 한다.
화폐 경제가 없으면 아무 거래도 할 수 없다.그리고 국민의 절반이 노비이다.유동적인 노동력이 없다면 누가 새로운 공장에서 일할 수 있을까.노비는 주인에게 노속되어 땅에 묶여 있던 . 즉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이 없었다.
당시 조선반도에는 산업혁명이나 근대화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없었다 .일본은 한일 병합기에 한반도에 산업기계, 자동차, 도로, 학교교육, 화폐경제, 신분제도 철폐 등을 도입했다.그로 인해 대량생산, 광역유통, 화폐와 상품의 교환경제, 유동적인 노동력을 창출하였다.그것이 한반도의 산업혁명과 근대화가 된다.
현재 한국은 모두 한국인이 만들고 일제강점기는 모든 것을 빼앗긴 암흑의 시대라고 교육받고 있다.역사인식이 다르기는커녕 정반대다.
바퀴를 만들지 못하고 어떻게 공업용 기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당시 산업기계는 증기기관의 동력을 큰 톱니바퀴가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임오군란에서 갑신정변,청일전쟁까지의 한반도 변화 - 천진조약 위반이 청일개전의 원인
민비는 일본형 개혁론자였다
청나라에 구제를 요구함으로써 책봉 정책이 명문화
갑신정변을 지원한 일본
러시아에 다가가는 민비
청나라가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은 조약 위반
나라를 버리고 망명한 국가원수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반도
민비는 당초 일본형 개화정책을 주장했었다.일본에서 사관병급 인사를 여럿 초빙해 군사교육을 하고 있다.이에 대한 반발로 인한 대원군 측의 폭동이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이다.이에 당황한 민비는 청나라에 접근하고 민비의 요청에 응한 청나라는 대원군을 붙잡아 연금하고 민비정권을 지원하여 폭동을 진압 한다.
이로써 청나라에 의한 한반도의 책봉정책이 명문화되게 된 . 거기서 중국지향의 개화정책을 취하게 된 민비와 일본형의 개화정책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분열하게 된다.
일본형 개화정책을 주장한 것이 김옥균이다.그리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다.이는 3일 천하로 불리는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으킨 민비 타도의 쿠데타지만 다시 청나라의 힘에 의해 실패로 끝난다.
이때 갑신정변을 지원하던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국지전이 벌어진다.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도 청일은 계속 눈싸움을 하고 톈진조약을 맺음으로써 긴장이 완화된다.
조약 내용은 청일 양국 모두 한반도에서 철수한다.다음에 한반도에 출병할 때는 사전 통고한다."는 것이었다.즉, 다음에 어느 한쪽이 출병하면 전쟁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던 .
일본과 청나라는 편리하게 한반도에 사용되었으나 일촉즉발의 상태를 일시 회피합니다.
일본과 청나라가 철수한 후에, 민비는 무려 러시아에 가까워지는 .러시아와 손잡으면 일본과 청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민비는 당초는 일본, 다음에 청, 그리고 청일이 철수하면 러시아가 붙는, 3다리 외교를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던 중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한다.폭동을 진압할 수 없다고 생각한 민비는 무려 다시 청에 파병을 의뢰한 것이다.
당연히 일본에는 사전 통지가 오고, 톈진 조약 파기를 바탕으로 일본도 출병하게 된다.이것이 청일전쟁의 발단이 된다.그리고 톈진조약 뒤편에서 민비가 러시아와 내통한 것이 러시아의 한반도 남하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1895년 민비는 암살당하고(을미사변), 1896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하여 망명을 시도하고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노관파천). 그리고 조선의 원격 통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경복궁으로 돌아온 뒤 대한제국을 건국하는 것도 러시아와 계속 통한다.이로써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추진되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한국의 양다리 정책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당시는 중일러라는 대국에 3다리 외교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종합하면 한반도는 문명개화가 되지 않아 어느 나라의 지원으로 성장하고자 일본형 개화정책을 폈으나 내홍이 터지자 곧바로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개화는커녕 책봉하가 되고 말았다.
청일전쟁은 바로 국내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청나라에 울부짖은 데서 비롯된다.그리고 다음으로 러시아에 접근해 한반도로 러시아를 끌어들임으로써 러일전쟁으로 발전했다.
주체성 없는 외교를 펼치며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발단 중 하나가 한반도입니다.그것을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김옥균 한국서 평가 안 받아 - 한국 대통령은 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안하나
왜 한국에서 김옥균이 평가받지 못하는지 궁금하다.적어도 일본에서의 평가와는 정반대의 평가다.사흘 천하란 그를 야유하는 말일까.분명 이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너무나 부주의한 쿠데타였다고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김옥균보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 훨씬 영웅인 듯하다.
일본은 유색인종 국가로 유일하게 산업혁명 및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다.김옥균은 이에 착안해 한반도의 근대화를 지향했다.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 근대화의 핵심을 담당한 사람들과 교류를 심화시켰다.
김옥균이 주창한 삼화주의란 일본 한반도 중국이 서로 독립을 유지하고 협력해 서양의 식민지 정책에 맞서자는 것이다.이러한 사상은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지향하는 길과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중국의 신해혁명을 지탱한 미야자키 도도천은 김옥균이 한반도의 손문이 되는 인물이었다고 칭했다 .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암살된 뒤 시신은 한반도로 돌려보낸다.두 번째 처형을 당하기 위해서다.토막토막 절단된 시신은 한반도 전역에 노출됐다.
예전에 한국인에게 왜 김옥균은 평가받지 못하냐고 물었을 때 김옥균은 시대를 잘못 보고 실패한 인물이라고 했다.참살당했으니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뜻이다.귀를 의심하는 발언이었다.
김옥균은 민비에 의해 보낸 자객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당합니다.김옥균을 상해로 불러들인 것은 바로 김옥균의 친구였습니다.
김옥균 참살 소식은 일본 내를 분노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장례식이 거행된 아사쿠사 히가시혼간지에서는 '청나라를 혼내라!청나라를 쓰러뜨려라!'의 대합창이 되었다고 한다.
그 반년도 지나지 않아 동학당의 난이 일어나 천진조약을 어긴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裕吉)는 김옥균(金玉均)을 귀여워하며 여러 차례 사저로 초청했다.그러나 한반도 자립근대화의 목표를 보고 탈아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결과는 일본이 청나라를 쓰러뜨리고 한반도는 독립국가가 되었다.고인이 된 김옥균의 사이였던 서재필에 의해 그 기쁨을 표현한 독립문이 현재의 서울에 건설되었다.독립문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한 것이지만, 일제로부터의 독립의 상징이라고 한국에서는 믿고 있다.현재 김옥균의 묘소는 일본 아오야마 영원에 놓여 있다.
참살당했으니 패자일까.나라를 위해 진실된 행동을 한 인간만이 후세에 그 길을 맡길 수 있다.대동아전쟁에 지원한 한반도 병사들도 마찬가지다.그들은 일본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다.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싸웠을 것이다.
당시 한반도 근대화를 뒷받침했던 사람들도 매국노처럼 취급된다.이런 진실의 발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한국은 정말 싫어하는 것 같다.
대동아전쟁에서 순사한 한반도 병사들이 잠든 야스쿠니 신사에 우리 대통령이 참배하지 않는 것은 이 또한 이상할 일이 아니다.한국은 진정한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싸운 병사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옛 일본군에 종군하다 전사한 조선인 병사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습니다.한국 대통령이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는 일은 없습니다.
노비 비율이 인구의 40%에 이른 이씨조선 한일 병합은 2,000년 지속된 노비 제도를 폐지했다
2,000년 지속된 노비제도
노비 양산을 요구한 양반
노비 줄이기 정책에 반대한 양반
갑오개혁과 한일병합으로 노비제도는 폐지
일본 통치를 도대체 누가 원망했을까
한국 학계에서는 이씨 조선시대 인구를 1,000만명 정도로 봤을 때대략 40%에 해당 하는 400만 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인 695년 서원경(현재의 청주 부근)의 4개 촌락을 조사한 문서에서는 460명의 인구 중 28명이 노비로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비율로는 6% 남짓이 된다.
조선 개국 직전인 1391년 이성계가 받은 봉토에서도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그곳에 사는 162명 중 노비는 약 4.3%인 7명에 불과했다.이것이 100년 후에는 인구의 40%에도 불어난다.
고려 시대에는 부모 중 한 명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되어 노비와 양반 양자의 결혼 자체가 불법이었다. 노비만의 상속이었기 때문에 크게 증가하지는 않았다.
일본에서는 율령제도의 종식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시기로서는 10세기 초순입니다.
이씨 조선시대에 이르러 고려시대 제도는 점차 느슨해져 양반으로서는 노비끼리 결혼시킬 것이 아니라 노비와 양자를 결혼시키는 것이 노비를 늘릴 수 있다 하여 적극적으로 양자와 노비의 혼인을 권유하였다.양반은 거의 무급의 노비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부를 늘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는 병역이나 납세의무를 지지 않는 때문에 국가로서는 노비가 늘어난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래서 조선의 일부 왕들은 노비의 수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폈다.
태종은 양인(노비 이외의 계층)의 남성과 여성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양인 자격을 부여하도록 했다.당시 양반 중에서는 여성 노비를 첩으로 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노비를 줄이고 입양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노비가 줄자 양반 관료들이 반발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여성 노비들이 멋대로 양인 남성에게 시집가 인륜을 어지럽힌다'는 구실을 앞세워 폐지를 요구했다.
1485년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에서는 부모 한쪽이 노비라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 하였다. 조선의 노비 수는 다시 급증하게 된다.
울산부, 단성 등 일부 지역에서는 노비 비율이 인구의 50?60%에 육박했고 1663년에는 한성부 호적에서 73%로 기록됐다.
양반은 사복을 채우기 위해 노비를 양산하고, 나라는 더 이상 노비가 늘어나면 국익으로서의 세수가 줄어드는 줄다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조선 내에서 양반의 세력은 막강하여 국왕이라 할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결과적으로는 1885년 갑오개혁에 따라 명목상 노비제도는 폐지된다.갑오개혁이란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가 독립국이 되기 위해 일본이 요구한 여러 개혁이다.
결국 1910년 한일병합 이후 호적제도 정비와 창씨개명으로 호적상 신분기재를 폐지하고 제도적 노비제도는 종식되게 된다.
일제강점기 근대화로 한반도에 유사 이래 2,000년 계속된 노비제도는 종식되고 40%나 되는 노비가 해방된다.
여기서 큰 의문이 생긴다.국민의 절반 가까이는 노비로부터 해방되어 일반인으로서의 권리를 얻게 되어 문화적 생활을 하게 되었다.그 사람들이 일본 통치를 원망할까.「자신이나 가족이나 장래의 자손을, 노비의 인생으로부터 해방시킨 일본을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양반은 분명히 노비를 혹사하여 사복을 채울 권리를 빼앗겼다.그러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그때까지 노비였던 사람들과 같은 계급이 된 것이다.항일운동이란 일본으로부터 권리를 빼앗기고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한반도를 일본은 식민지화했다고 한국은 말하지만, 일본은 40%나 되는 노비를 해방시켰습니다.한반도를 식민지로 한 것은 조선의 특권계급이었던 양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