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원래 독립국이 아니다 1000년 속국이었던 조선을 독립시킨 것은 일본이다
2021-06-26
카테고리:이씨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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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조선을 보호국화하고 독립시켰다
일본이 한반도의 독립을 빼앗았다는데 정말 그럴까.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한반도를 독립시킴과 동시에 실질적인 보호국으로 삼았다.이것을 일본 식민지화의 첫걸음이라고 한국에서는 말하는 것 같지만 보호국화한 이유는 간단했고 조선반도는 군사방위, 행정기구, 조세관리 등 전혀 국가로서의 몸을 이루지 못했고 일단 독립을 시켰다고 해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
조선왕조에는 자립심이 결여된
일본이 한반도의 다양한 개혁을 통해 실질적으로 독립국으로 만드는 목표는 고송의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국가원수가 도망간 사건)으로 좌절된다.고종은 러시아의 연금 상태가 되면서 원격적으로 한반도 이권이 러시아에 차례로 넘어가게 된다.러시아의 권익이 확대되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 유화정책이 원인이라는 책임을 물어 1901년 총리대신직을 사임하게 된다.
아울러 읽고 싶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의해 한일병합으로
고종이 귀환한 뒤에도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멈추지 않고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만주에 러시아가 주둔한 뒤 러일전쟁으로 발전한다.일본은 한반도의 외교권을 박탈한다(제2차 한일협약). 러일전쟁 이후에도 고종은 러시아와 연결되어 나라를 파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으로 일본이나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결국 일본은 한반도 독립을 완전히 포기하고 한일 병합으로 향하게 된다.
당시의 #gren #조선반도는 일본의 보호 아래 최초로 독립국 상태였던 #/gren #.한반도 정부는 실질적인 독립을 위한 노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러시아에 접근했다.러시아의 이권 요구는 거세지기만 했고 양자택일론처럼 일본과 병합조약을 맺었다.
아울러 읽고 싶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자 외교 - 밀사는 왜 무시당했지?주권을 포기한 조선을 세계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
러일전쟁 전 대한제국 건국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돕고 결국 외교권을 박탈
헤이그 밀사 사건은 한심한 외교 실패
주요 밀사의 활동
헤이그 밀사사건 이전에 이미 주권포기
러시아 이권의 남하가 러일전쟁의 원인
국가원수가 도망쳐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하는 실수를 벌인 고종은 제1차 러일의정서(고촌 베버협정), 제2차 러일의정서(산현 로바노프협정)가 체결되고 그 전제 아래 경운궁으로 돌아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제국의 이름을 국호에 붙이는 것은 일본 중국과 동격이라는 뜻이었으나 일본은 이를 승인했다.
이후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 중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1905년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에 따라 한반도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러일의정서에 의해 러시아와의 이야기를 붙여 일본은 일본과 동격인 대한제국의 건국을 도왔음에도 고종이 러시아 이권을 끌어들이게 된다.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외교권 회복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이 1907년 헤이그 국제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현재 행해지고 있는 고자 외교와 같은 일을 당시에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했을 러시아가 배신하고 참가국 모두에게 거절당했고 고종이 보낸 밀사는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관할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장이 되었다.
[주요 밀사 활동]
회의 의장을 맡고 있는 러시아 제국 주석 대표 네리도프 백작을 방문하지만 면회를 거절당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각국 대표를 방문하지만 지원을 거부당한다.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부 장관에게 면회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의 회의는 일본의 한반도 관할권을 인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애초 민비암살이나 춘생문 사건을 거쳐 국가원수인 고송이 1896년 하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망명했다(노관파천).이 시점에서 세계로부터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로 이미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본덕분에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조선은 주권을 포기한 것이다 .
망명지에서 원격통치 같은 것을 하려 해도 이미 러시아의 연금 상태여서 차례차례 러시아는 한반도의 이권을 챙기게 됐다.고종이 조선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건국한 후에도 러시아는 한반도 이권을 계속 챙겼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러일전쟁이다.
이씨조선은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청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겼고, 로관파천으로 러시아 이권에 침식되어 러일전쟁에 이르게 됩니다.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에 불복하여 밀사를 보낸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입니다.그 후 일본은 한반도의 독립을 포기하게 됩니다.
즉 한국이 현재도 말하는 일본이 나라를 빼앗았다는 것은 옳은 표현이 아니며 조선은 독립국이 아니었다.청 왕조가 일본에 한반도를 빼앗겼다고 한다면 이해가 된다.그런 곳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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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순송은 한일 병합 후에도 당구에 흥하는 생활 - 일본은 한반도를 노예화했다는데?
한일병합 후 순송의 컨디션은 회복
당구나 프랑스 요리를 흥겹게 하는 나날
천황폐하를 경애한 순송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송(李坧)은 한일 병합 후 경성부 창덕궁에서 살다가 왕으로 책립되어 이왕으로 칭해졌다.
병합 전에는 심신이 쇠약해져 시종에 의지하지 않으면 보행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이 무렵에는 보행이 가능해지면서 쾌활하게 응대하게 되었다.
테라우치 마사키는 「국사다난의 심통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고 있다.
이왕은 매우 신경질적이어서 기상 목욕 취침 시간은 스스로 시계를 보고 제시간에 했다.평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취미인 당구에 흥했고 밤에는 축음기를 듣는 생활을 했다.
또 이태왕이 된 아버지 고종과 마찬가지로 기억력이 뛰어나 알현자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제국호텔 초대 주방장을 지낸 요시카와 가네요시 부자의 프랑스 요리를 좋아해 거의 매일 먹고 있었다.
1917년 6월에는 일본을 방문, 10년 전 방한한 다이쇼 천황을 알현하는 형식으로 재회했다.
11월에는 창덕궁 대부분이 소손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불에 탄 낙선재라는 건물로 옮겼으나 비좁았다.이완용은 이태왕이 사는 덕수궁으로 이전하는 방안도 검토됐으나 이를 들은 이완용은 천황이 내린 창덕궁이니 움직이지 않겠다며 이완용을 질책했고 이후 2년간 창덕궁 중수가 끝날 때까지 낙선재에서 살았다.
한반도는 일본에 노예화되었을까요?통상 정복당한 쪽의 왕족은 처형되거나 추방되는데...
임오군란에서 갑신정변,청일전쟁까지의 한반도 변화 - 천진조약 위반이 청일개전의 원인
민비는 일본형 개혁론자였다
청나라에 구제를 요구함으로써 책봉 정책이 명문화
갑신정변을 지원한 일본
러시아에 다가가는 민비
청나라가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은 조약 위반
나라를 버리고 망명한 국가원수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반도
민비는 당초 일본형 개화정책을 주장했었다.일본에서 사관병급 인사를 여럿 초빙해 군사교육을 하고 있다.이에 대한 반발로 인한 대원군 측의 폭동이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이다.이에 당황한 민비는 청나라에 접근하고 민비의 요청에 응한 청나라는 대원군을 붙잡아 연금하고 민비정권을 지원하여 폭동을 진압 한다.
이로써 청나라에 의한 한반도의 책봉정책이 명문화되게 된 . 거기서 중국지향의 개화정책을 취하게 된 민비와 일본형의 개화정책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분열하게 된다.
일본형 개화정책을 주장한 것이 김옥균이다.그리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다.이는 3일 천하로 불리는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으킨 민비 타도의 쿠데타지만 다시 청나라의 힘에 의해 실패로 끝난다.
이때 갑신정변을 지원하던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국지전이 벌어진다.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도 청일은 계속 눈싸움을 하고 톈진조약을 맺음으로써 긴장이 완화된다.
조약 내용은 청일 양국 모두 한반도에서 철수한다.다음에 한반도에 출병할 때는 사전 통고한다."는 것이었다.즉, 다음에 어느 한쪽이 출병하면 전쟁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던 .
일본과 청나라는 편리하게 한반도에 사용되었으나 일촉즉발의 상태를 일시 회피합니다.
일본과 청나라가 철수한 후에, 민비는 무려 러시아에 가까워지는 .러시아와 손잡으면 일본과 청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민비는 당초는 일본, 다음에 청, 그리고 청일이 철수하면 러시아가 붙는, 3다리 외교를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던 중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한다.폭동을 진압할 수 없다고 생각한 민비는 무려 다시 청에 파병을 의뢰한 것이다.
당연히 일본에는 사전 통지가 오고, 톈진 조약 파기를 바탕으로 일본도 출병하게 된다.이것이 청일전쟁의 발단이 된다.그리고 톈진조약 뒤편에서 민비가 러시아와 내통한 것이 러시아의 한반도 남하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1895년 민비는 암살당하고(을미사변), 1896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하여 망명을 시도하고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노관파천). 그리고 조선의 원격 통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경복궁으로 돌아온 뒤 대한제국을 건국하는 것도 러시아와 계속 통한다.이로써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추진되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한국의 양다리 정책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당시는 중일러라는 대국에 3다리 외교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종합하면 한반도는 문명개화가 되지 않아 어느 나라의 지원으로 성장하고자 일본형 개화정책을 폈으나 내홍이 터지자 곧바로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개화는커녕 책봉하가 되고 말았다.
청일전쟁은 바로 국내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청나라에 울부짖은 데서 비롯된다.그리고 다음으로 러시아에 접근해 한반도로 러시아를 끌어들임으로써 러일전쟁으로 발전했다.
주체성 없는 외교를 펼치며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발단 중 하나가 한반도입니다.그것을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미국 윌리엄 그리피스가 쓴 이씨조선 일제강점기 이전의 한반도가 보입니다.
서울로 호송된 네덜란드인 일행은 마치 구경거리의 야수 같았다.하얀 얼굴과 붉은 수염을 가진 이 외국인을 보러 군중이 몰려들었다.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잘 보이는 곳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모두가 네덜란드인이 물건을 마시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서양인들은 술을 마실 때 코를 귀보다 위로 잡아 올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사람에 비유되며 왕은 그 머리, 귀족은 몸통, 인민은 발이다.가슴과 배는 부풀어 오르는 반면 머리와 하지는 말라 있다.귀족은 그 강욕으로 인민의 생혈을 헹굴 뿐만 아니라 왕의 대권도 침범하고 있다. 나라는 충혈을 일으키고 관료주의의 부종을 앓고 있다. .
고문의 풍부함은 조선이 아직도 반문명국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법원과 감옥의 발명품으로는 쇠사슬, 등을 치기 위한 대나무, 엉덩이를 치기 위한 패들 모양의 기구, 살이 터질 때까지 종아리를 치기 위한 채찍, 고기와 내장을 괴롭히기 위한 밧줄, 손으로 쥐어주기, 지팡이, 그리고 무릎과 건넌방망이를 치기 위한 판 등이 있다.
결혼 후에는 여자와의 접촉이 불가능하다.여자는 거의 항상 안방에 틀어박혀 용서를 받지 않고 집 밖을 내다볼 수조차 없다.격리가 너무 엄격해서 외부인의 손가락이 닿았다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딸을, 남편은 아내를 죽이고 아내는 자살할 수 있다 .
조선의 건축은 극히 원시적인 상태에 있다.성곽, 요새, 사찰, 수도원 및 공공건축은 일본이나 중국의 장려함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이 나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 석조 유적이 거의 없다.주거지는 기와집이나 초가집으로 거의 예외 없이 단층집이다.소도시에서는 규칙적인 대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곳곳에 산재해 있다.대도시나 수도에서도 거리는 좁고 구불구불하다.
조선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문맹이다.아마 농민 계급의 남자 열 명 중 네 명이 중국어나 조선어를 읽을 수 있겠지만 여자도 계산에 넣으면 약 85%의 사람들은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다만 지역차는 크다.
조선에는 사무라이가 없다.일본에서 조선에 부족한 것은 심신이 잘 단련되고 병사인 동시에 학자이며 충성심과 애국심과 자기희생의 높은 이상을 내세우는 문화적 집단이다.
당시 한반도를 전한 저서는 여러 편이지만 내용은 공통적으로 양반의 횡포, 관료부패, 문화가 미개함을 전하고 있습니다.한국에서 전해지는 이씨조선만이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민비암살 범인은 누구야?한국의 주장은 사뭇 다르다.일본인 중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민비 남편 고종은 암살범을 알고 있었다
아들 순종은 암살범을 목격
지위를 박탈하고 평민으로 처리
한국의 무근거 역사인식
여러 궁녀 중 유일하게 살해된 민비
몇 안 되는 민비의 얼굴을 아는 인간
고종은 1906년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알현하면서 내 부하 중 범인이 있었다 라고 말했고,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민비 암살사건 혐의로 특사된 조희연 우범선 이두황 이범호 권희진 등 6명에 대해 왕비를 살해한 장본인이라며 처형을 칙명했다.
살해 현장에 있던 순종은 우범선이 국모의 원수임을 목격했다고 보고했고, 또 우범선 자신도 자신이 민비를 살해했다고 자백 한 바 있다.
우범선은 순종이 쏜 것으로 알려진 자객 고영근과 노윤명에 의해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1903년(메이지 36년) 11월 24일 암살된다.
조선에서는 민비 암살 이틀 뒤(10월 10일) 민비의 사망이 일반에 공표되기 전에 대원군이 민비 왕후의 지위를 박탈하고 평민에게 떨어뜨리는 조칙이 공포된다.이때 민비의 사망은 아직 공표되지 않았다.
즉, 국내적으로는 평민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정부는 조선 국내에서 행한 재판에서 흥선대원군의 주모로 하는 판결 를 내렸다.
사건은 대원군이 주모한 암살사건으로 처리되었습니다.그리고 민비는 평민으로서 사망을 공표당합니다.
한국인들이 믿고 있는 일본인이 민비 암살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왕비를 끌어내 두세 곳에 베인 상처를 입히고 나체로 웃으며 또 화를 내면서 왕비의 국부를 꼼꼼히 검사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민비를 살해했다는 얘기다.
참고로 그 근거가 되는 자료의 제시는 평소와 같이 없다.위안부의 이야기나 군함도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선정적인 이야기로 바꾸어 상대방이 충격을 받는 동안 근거 없는 이야기로 바꾸어 결론짓는다.
남편 고종의 부하가 아들 순종이나 여러 인간 앞에서 이런 짓을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민비암살 시 궁중에는 100명 정도의 궁녀, 하녀가 있었고 민비 1명만이 살해되었다. 민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누구 하나 틀리지 않고 민비를 암살하고 있는 것이다.
민비와 접견할 수 있는 인간은 한정된다.게다가 암살을 마치고 범인들은 곧바로 도망치고 있다.국부에 기름을 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참고로 현재 민비로 추정되는 사진은 민비가 아니라는 학설은 1910년까지의 일본이나 유럽 자료에서는 정장 한국의 부인 궁중의 시녀 궁녀로 소개된 것으로 이 사진을 민비이라고 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밝히고 있다.그렇게 민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민비암살의 진실은 한국의 주장과는 사뭇 다르다.일본인 중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일본 외교관 미우라 공사등 관계자 48명은 일본에서 재판을 받아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 군법회의에 회부된 장교 8명도 전원 무죄 방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