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1906년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알현하면서 #ylow #내 부하 중 범인이 있었다 #/ylow #라고 말했고,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민비 암살사건 혐의로 특사된 조희연 우범선 이두황 이범호 권희진 등 6명에 대해 왕비를 살해한 장본인이라며 처형을 칙명했다.
아들 순종은 암살범 목격
살해 현장에 있던 순종은 우범선이 국모의 원수임을 목격했다고 보고했고, 또 우범선 자신도 자신이 민비를 살해했다고 자백 #/ylow #한 바 있다.
우범선은 순종이 쏜 것으로 알려진 자객 고영근과 노윤명에 의해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1903년(메이지 36년) 11월 24일 암살된다.
지위를 박탈하고 평민으로 처리
조선에서는 민비 암살 이틀 뒤(10월 10일) 민비의 사망이 일반에 공표되기 전에 대원군이 민비 왕후의 지위를 박탈하고 평민에게 떨어뜨리는 조칙이 공포된다.이때 민비의 사망은 아직 공표되지 않았다.
즉, 국내적으로는 평민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정부는 조선 국내에서 행한 재판에서 흥선대원군의 주모로 하는 판결 를 내렸다.
MEMO
사건은 대원군이 주모한 암살사건으로 처리되었습니다.그리고 민비는 평민으로서 사망을 공표당합니다.
한국의 무근거 역사인식
한국인들이 믿고 있는 일본인이 민비 암살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왕비를 끌어내 두세 곳에 베인 상처를 입히고 나체로 웃으며 또 화를 내면서 왕비의 국부를 꼼꼼히 검사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민비를 살해했다는 얘기다.
참고로 그 근거가 되는 자료의 제시는 평소와 같이 없다.위안부의 이야기나 군함도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선정적인 이야기로 바꾸어 상대방이 충격을 받는 동안 근거 없는 이야기로 바꾸어 결론짓는다.
남편 고종의 부하가 아들 순종이나 여러 인간 앞에서 이런 짓을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많은 궁녀 중 유일하게 살해된 민비
민비암살 시 궁중에는 100명 정도의 궁녀, 하녀가 있었고 민비 1명만이 살해되었다. 민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누구 하나 틀리지 않고 민비를 암살하고 있는 것이다.
민비와 접견할 수 있는 인간은 한정된다.게다가 암살을 마치고 범인들은 곧바로 도망치고 있다.국부에 기름을 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몇 안 되는 민비의 얼굴을 아는 인간
참고로 현재 민비로 추정되는 사진은 민비가 아니라는 학설은 1910년까지의 일본이나 유럽 자료에서는 정장 한국의 부인 궁중의 시녀 궁녀로 소개된 것으로 이 사진을 민비이라고 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밝히고 있다.그렇게 민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아울러 읽고 싶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자 외교 - 밀사는 왜 무시당했지?주권을 포기한 조선을 세계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
러일전쟁 전 대한제국 건국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돕고 결국 외교권을 박탈
헤이그 밀사 사건은 한심한 외교 실패
주요 밀사의 활동
헤이그 밀사사건 이전에 이미 주권포기
러시아 이권의 남하가 러일전쟁의 원인
국가원수가 도망쳐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하는 실수를 벌인 고종은 제1차 러일의정서(고촌 베버협정), 제2차 러일의정서(산현 로바노프협정)가 체결되고 그 전제 아래 경운궁으로 돌아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제국의 이름을 국호에 붙이는 것은 일본 중국과 동격이라는 뜻이었으나 일본은 이를 승인했다.
이후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 중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1905년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에 따라 한반도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러일의정서에 의해 러시아와의 이야기를 붙여 일본은 일본과 동격인 대한제국의 건국을 도왔음에도 고종이 러시아 이권을 끌어들이게 된다.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외교권 회복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이 1907년 헤이그 국제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현재 행해지고 있는 고자 외교와 같은 일을 당시에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했을 러시아가 배신하고 참가국 모두에게 거절당했고 고종이 보낸 밀사는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관할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장이 되었다.
[주요 밀사 활동]
회의 의장을 맡고 있는 러시아 제국 주석 대표 네리도프 백작을 방문하지만 면회를 거절당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각국 대표를 방문하지만 지원을 거부당한다.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부 장관에게 면회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의 회의는 일본의 한반도 관할권을 인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애초 민비암살이나 춘생문 사건을 거쳐 국가원수인 고송이 1896년 하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망명했다(노관파천).이 시점에서 세계로부터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로 이미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본덕분에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조선은 주권을 포기한 것이다 .
망명지에서 원격통치 같은 것을 하려 해도 이미 러시아의 연금 상태여서 차례차례 러시아는 한반도의 이권을 챙기게 됐다.고종이 조선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건국한 후에도 러시아는 한반도 이권을 계속 챙겼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러일전쟁이다.
이씨조선은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청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겼고, 로관파천으로 러시아 이권에 침식되어 러일전쟁에 이르게 됩니다.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에 불복하여 밀사를 보낸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입니다.그 후 일본은 한반도의 독립을 포기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