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이었던 조선인의 일본군 입대.전쟁의 목적을 잘 알고 있던 입대 지원자
2021-10-03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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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조선인 지원병
연도 지원자 입소자 선발률 지원 배율 1938년 2,946명 406명 16.2% 7.3배 1939년 12,348명 613명 4.9% 20.2배 1940년 84,443명 3,060명 3.6% 27.6배 1941년 144,743명 3,208명 2.2% 45.1배 1942년 254,273명 4,077명 1.6% 62.4배 1943년 303,394명 6,000명 1.9% 50.6배
극소수였던 조선인 일본군
상기는 한반도에서의 일본군 모집병에 대한 한반도인의 응모 인원과 채용 인원입니다. 입대 시험에는 일본어 실력이나 이해력,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 전쟁의 목적이나 세계 정세 등 다양한 항목이 테스트되어 1942년에는 경쟁률 62.4 대 1이 되었고 합격한 사람은 불과 1.6%였습니다.
아울러 읽고 싶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자 외교 - 밀사는 왜 무시당했지?주권을 포기한 조선을 세계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
러일전쟁 전 대한제국 건국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돕고 결국 외교권을 박탈
헤이그 밀사 사건은 한심한 외교 실패
주요 밀사의 활동
헤이그 밀사사건 이전에 이미 주권포기
러시아 이권의 남하가 러일전쟁의 원인
국가원수가 도망쳐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하는 실수를 벌인 고종은 제1차 러일의정서(고촌 베버협정), 제2차 러일의정서(산현 로바노프협정)가 체결되고 그 전제 아래 경운궁으로 돌아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제국의 이름을 국호에 붙이는 것은 일본 중국과 동격이라는 뜻이었으나 일본은 이를 승인했다.
이후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 중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1905년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에 따라 한반도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러일의정서에 의해 러시아와의 이야기를 붙여 일본은 일본과 동격인 대한제국의 건국을 도왔음에도 고종이 러시아 이권을 끌어들이게 된다.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외교권 회복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이 1907년 헤이그 국제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현재 행해지고 있는 고자 외교와 같은 일을 당시에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했을 러시아가 배신하고 참가국 모두에게 거절당했고 고종이 보낸 밀사는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관할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장이 되었다.
[주요 밀사 활동]
회의 의장을 맡고 있는 러시아 제국 주석 대표 네리도프 백작을 방문하지만 면회를 거절당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각국 대표를 방문하지만 지원을 거부당한다.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부 장관에게 면회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의 회의는 일본의 한반도 관할권을 인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애초 민비암살이나 춘생문 사건을 거쳐 국가원수인 고송이 1896년 하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망명했다(노관파천).이 시점에서 세계로부터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로 이미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본덕분에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조선은 주권을 포기한 것이다 .
망명지에서 원격통치 같은 것을 하려 해도 이미 러시아의 연금 상태여서 차례차례 러시아는 한반도의 이권을 챙기게 됐다.고종이 조선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건국한 후에도 러시아는 한반도 이권을 계속 챙겼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러일전쟁이다.
이씨조선은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청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겼고, 로관파천으로 러시아 이권에 침식되어 러일전쟁에 이르게 됩니다.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에 불복하여 밀사를 보낸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입니다.그 후 일본은 한반도의 독립을 포기하게 됩니다.
MEMO 모집에 참여한 조선인 지원병은 일본군으로서 싸우는 것은 한반도를 지키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전선에서 싸운 일본군, 후방지원을 한 조선인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전쟁에서는 일본인이 최전방에서 싸우고 한반도인은 후방지원이라는 형태로 군수관련 공장에서 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원하지 않으면 전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에서 징병이 시작된 것은 종전 전인 1944년부터입니다. 한반도인 군인의 사망자율은 9.2%, 일본군 전체의 사망자율은 해군이 24.22%, 육군은 19.76%입니다.
전쟁의 목적을 이해하고 있던 조선인 지원병
입대한 한반도 병사들은 언어는 물론 이 전쟁의 목적이 아시아 개방을 위한 전쟁이라는 점과 역사적 배경 등을 충분히 이해한 후 자원했다. 아시아 방위는 한반도 방위와 동의한다. 그들은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지원했습니다.
POINT 현재 한국에서는 일본군에 입대한 젊은이들은 친일의 배신자라고 합니다. 군인의 명예에 진흙을 계속 칠하는 행위는 비열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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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서울독립문은 청일전쟁 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여 서재필이 건설한 것 그것조차 모르는 한국대통령
동학당의 난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조약에서 한반도의 독립이 명기되자 이를 기뻐한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청나라 복속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부수고 터 옆에 독립문을 세웠다.이것이 한국 서울의 독립문이다.
서재필은 김옥균의 소꿉친구로 일본 게이오대학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을 지향하지만 김옥균은 민비에 의해 보내진 자객에게 상하이에서 암살 당하고 모국으로 돌아와 시신을 토막토막 절단당해 각지에 버려지는 비참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한반도 내에 남은 서재필의 가족들도 민비 등에 의한 숙청 를 받아 차례차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됐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서명인은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입니다.독립문은 김옥균의 동지 서재필이 지은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독립문이 일제 강점기로부터 독립한 기념으로 지어진 문이라고 믿는다.그 문 앞에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뻐하는 인간이 문재인이다.대통령 출마 선언도 독립문에서 이뤄졌고 광복절에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뻐하듯 이 문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대통령의 역사인식이 이 정도면 한일관계가 개선될 리 없다.
한국에서는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해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의 날로 되어 있습니다.그날 독립문에서 기념촬영이라니 놀랍네요
러시아의 아시아 식민지 계획은 시베리아 철도를 보면 분명하다
러시아의 진출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육로로부터의 아시아 식민지 계획입니다.
1850년 시베리아 철도 계획이 시작되었다.
1884년 러-조 수호통상조약··청일전쟁 개전 다음날 러시아와 조선이 조약 체결.
1885년 러-조 밀약사건··일본, 청-영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맺으려 한 밀약.첫 번째는 이홍장, 두 번째는 원세개에게 발각돼 실패.
1888년 러-북 육로통상조약...러시아인을 한반도 100리까지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도록 하였다.
1890년 시베리아 철도가 우랄 강을 넘는 다리가 완성.
1896년 러시아는 청으로부터 만주의 북부를 횡단해, 하얼빈등을 경유하는 동청 철도의 부설권을 취득(러청 밀약).
189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까지의 철도, 우수리선 완성
1898년 뤼순·다롄 조차·중국 뤼순·다롄을 러시아가 조차.요동반도가 러시아로 넘어가다.
1900년 마산포 조차...경상남도 마산포(현재의 창원시)를 러시아가 조차.
1900년 만주·한반도 교환론·만주의 이권을 일본이 러시아에 인정함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러시아가 손을 떼자는 협상(러시아는 묵살)
1900년 북청사변··의화단의 난을 평정할 목적으로 러시아가 만주로 진군, 평정 후에도 퇴거하지 않고 눌러앉는다.
1902년··일·영 동맹
1903년 용암포 사건...러시아군이 압록강 하구(현재 북한) 용암포에 군사거점을 건축
1903년 러청 밀약에 의한 동청 철도 완성.
1904년 발틱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출항.
1904년 바이칼 호수 개통으로 시베리아 철도 전 노선이 개통되었다.
1905년 일본해해전에서 발틱 함대가 괴멸하여 종전.포츠머스 조약 체결
1905년 일본이 한반도 외교권 박탈, 보호국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암살
1910년 한일 병합
이승만은 일본을 싫어하고 역사를 새로 썼다 현 정부가 '더 나은 정부'로 만들기 위해 반복된 숙청
종전 후 한국 정부가 가장 싫어했던 것이 일본 시대가 더 나았다는 말일 것이다.실제로 대만에서는 2.28사건이 일어나 친일파가 폭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승만 전 대통령도 그 사건을 듣고 경계했을 것이다. 2.28사건은 1947년에 발발했고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되었다. .대만에서 이때 내려진 계엄령은 38년이나 됐다.
건국 후 바로 이뤄진 것이 친일 배제다.일본 통치를 그리워했을 뿐 공산주의자 등과 마찬가지로 정치범으로 간주돼 체포 투옥됐다.건국 이래 불과 2년 만에 무려 일제 강점기 35년간의 체포자 수를 넘어선 것이다 .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의 대부분을 국외에서 보냈기 때문에 실제로 일본 통치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니다.그냥 일본이 너무 싫었다.이승만이 미국으로 망명하던 시절에는 일제 강점기 이전의 이씨 조선이 동양의 이상국가라고 선전했을 정도였다.
대만에서는 일본 통치가 끝났지만 그곳에 온 것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이었고 그 정치는 끔찍했다.한국에서도 일제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나라를 잘 통치 운영할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일제강점기에 나라 운영에 종사했던 사람들을 일제 잔재로 속속 추방해 갔으니 정치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 집단이 정치행정을 맡는 셈이다.이 밖에 북한과 결탁해 국가 전복을 노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숙청, 학살도 많이 자행되고 있다.
군사정권으로 출범한 대한민국에 국가운영의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은 친일이자 공산주의자였다.그것들을 히스테리적으로 배제해 간 한편, 보도연맹 사건 외, 제주도 4·3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등 정부 실정 비판의 눈을 돌리기 위해서도 반일이 사용되었다 .
보도연맹 사건공산주의자와 그 가족들을 재교육하는 시설에서 자행된 학살사건.
제주도 4·3사건 미 육군사령부 군정청 지배하에 있는 남조선 제주도에서 일어난 폭동에 대해 학살이 자행된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625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한국의 국민방위군사령부 간부들이 국민방위군에 공급된 군사물자와 군량미 등을 빼돌렸다.횡령으로 9만여명의 한국군 병사가 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사도 새로 썼다.이승만 자신이 일제강점기를 모르니 역사를 새로 쓰는 것은 오히려 쉬웠다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는 착취당하고 노예화되었다는 역사관은 한국 건국 후 국내 정치가 잘 되지 않더라도 일본 통치 시대보다 훨씬 낫다는 가공의 '더 나은 정부'를 만든 것이다 .
그 역사관을 사회통념화하기 위해서는 일본 통치를 긍정하는 것만으로도 정치범이 되는 셈이다.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사회통념과 교육을 지금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서울 명동은 일본인이 만든 메이지 마을입니다.메이지좌(明治座)에서는 많은 조선어 영화와 오락이 공개되었다.
명동은 한국의 대표적인 번화가이자 관광지인데, 원래는 일제강점기에 메이지초 로 개발된 마을이다.이 일대는 일본인 거주자가 많아 한반도의 긴자로 불리며, 1930년대에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경성점을 비롯해 5개의 백화점이 모이는 격전구가 되어 반도에서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다.경성부에는 메이지좌(明治座)가 개업하여 많은 영화와 연극이 개봉되었다.
한반도사람들은일제하에서근대화를보고문화적인생활을하게되었습니다.
1937년 4월 24일에는 성봉영화각과 신흥키네마가 합작하고 이규환(조선어판)과 스즈키 시게요시가 공동 감독한 조선어 최초의 토키 나그네(조선어판)(일본 개봉제 여로)가 동관에서 개봉되었다.
동관에서는 일본어판의 상영이었지만, 같은 날, 부내의 우미관에서는 조선어판이 공개되고 있다.조선의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의 개봉관 역할도 해 1940년 8월 6일에는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등록금(조선어판)(감독 최인규), 1941년 2월 19일에는 동아영화사가 제작한 영화 지원병(감독 안유영)이 이 관에서 개봉했다.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일제강점기에 의한 근대화는 한반도 사람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음이 분명하다.초가집에 살며 오솔길을 오가던 동네가 자국 감독이 작성한 조선어 영화를 즐기는 생활로 바뀐 것이다.한국은 일본에 수탈되어 노예화되었다고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한반도에서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계급사회였고, 조선 후기에는 노비의 비율이 지역에 따라 절반에 달했습니다.신분제를 폐지하고 노비를 풀어준 것은 일본입니다.
한자를 배우는 일본 한자를 폐지한 한국 문자를 폐지함으로써 과거사가 블랙박스에
한자를 읽지 못하고 역사를 읽을 수 없다
한국의 독자적인 문자 한글
과거사 원문을 읽는 일본인
역사정보를 특권계급이 독점?
한국은 1970년 한자를 폐지했다.오선화씨는 당시를 돌아보며 1970년 봄이면 모든 교과서에서 한자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민족의 문자를 쓴다는 이유 같지만 결과를 보면 한국인들은 과거 문서를 읽을 수 없게 됐다.과거 한자가 사용되어 기록된 일체의 역사를 읽을 수 없다.
한글은 일본에서는 표음문자라고 불리는데, 정확히는 음절문자가 된다.한자의 한 글자 음독을 한글 한 글자로 대체한 것이다.그래서 동음이의어는 같은 한글 문자로 표현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지 알 수 없다.이것은 일본의 히라가나 표기와 같을 것이다.
과거사를 인터넷으로 조사해도 좀 더 원문, 전문을 일으킨 기사를 찾아 결과적으로 공문관 원문을 확인하기도 한다.공문관에서는 공개된 과거 공문을 원본 친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안중근의 자서전도 그의 친필 그대로 공개돼 있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 회상 부분도 읽을 수 있다.그런 과정 속에서 인터넷 리터러시가 유지되는데 한국에서는 어떨까.
한글로 자의적으로 쓰인 정보에만 노출돼 원문을 스스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 일반에 문자가 보급되지 않은 것은 특권계급이 정보를 독점했기 때문이다.노비에게 문자나 정보는 필요 없다.한자 폐지로 무엇이 초래되었는가 하면 과거사가 특권계급의 전유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공문서는 모두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원본 그대로 공문서에 보관되어 있으며 현재는 인터넷으로도 열람이 가능하다.한자를 읽을 수 있다는 특정 한국인만 접근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대로 한자를 읽을 수 있다면 한국 정부는 곤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