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독립국으로 취급한 북일 수호조규 천황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이 시대부터 변함이 없다
2022-01-13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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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조선 개국의 계기가 되었다
1876년 체결된 북일수호조규는 불평등조약이라는 측면이 있으나 조선을 독립국으로 한 최초의 조약으로 조선왕조 개국의 계기가 되었다.강화도 조약라고도 불린다.북-일 간에는 에도시대에는 조선통신사에 의한 국교가 있었지만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메이지천황의 국서를 조선은 받지 않았다.
격하에 대접받기를 꺼린 조선
이유는 도쿠가와와는 대등한 관계였는데도 도쿠가와를 신하로 하는 천황의 존재는 조선왕조를 격하에 위치시키는 라는 이유나 종주국 청나라 황제에 대해 천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여기서 북-일은 단교 상태가 된다.
MEMO 지금도 한국은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릅니다.천황의 칭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 시대에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청나라는 종주국이지만 책임지지 않는다
1875년 일어난 북-일 간 무력충돌인 강화도 사건을 거치면서 일본은 사죄 요구 등을 포함해 청나라에 대해서는 종주국이라면 책임지라고 요구한다.이에 대해 청은 조선은 속국이지만 다른 민족, 다른 정치형태를 갖고 있으며 청은 책임이 없다 라고 밝히고 있다.이를 바탕으로 북-일 수호조규 제1관에는 '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과 평등의 권리를 가진 국가로 인정한다.'고 기재되게 된다.
아울러 읽고 싶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을 독립시킨 것은 일본
청나라의 속국이기는 하지만 독립국가로서 다소 모순되는 점을 포함하면서 양자 국교가 시작된다.이후 1894년 발발하는 청일전쟁을 거쳐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의 나라임을 확인하고 독립자주를 손해보는 조선국으로부터 청국에 대한 공·헌상·전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고 기재되어 명실상부한 조선은 독립국이 되었다.이 조약을 체결한 일본 측 책임자가 이토 히로부미이다.
POINT 조선은 수백 년래 독립국이 아니었습니다.독립국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일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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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한일 병합에 반대했던 정치 인생.정한론과 메이지 6년 정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사살되었습니다.이토(伊藤)는 한반도 병합에 대해 시종일관 반대 입장이었습니다.청일전쟁강화조약(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명기하고 청나라에 약속을 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총리직은 1901년 퇴임.한국통감도 1909년 6월 퇴임했고 마지막 직책은 추밀원 의장입니다.의장직이란 명예직이긴 하지만 중립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정치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총리도 아니고 통감도 아닌 의장이 암살된 것입니다 .
암살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명예직이라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는 것 1873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정한론을 저지한 것도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이토(伊藤)는 젊고 32세였습니다.이는 메이지 6년 정변이라고 불리며 천황 폐하의 정한론 폐지 칙명이 내려지게 되어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참의의 절반이 사직하고 군인, 관료 600여 명이 사직하게 됩니다.
여기서 메이지유신의 일등공신이었던 사쓰마번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불분명한 것은 안중근이 무슨 목적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살해라고 해도 안중근이 가지고 있던 권총 브로닝총 탄환은 이토의 체내에서는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몰랐다고 증언했고 자서전에도 분명히 썼다.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 요직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살해가 일본 정부에 미치는 영향이나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1909년 7월 6일 가쓰라 내각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단행할 방침 및 대한시설 대강령'을 각의 결정했습니다.이토 히로부미 암살 전 병합은 결정되었고 , 1901년 이토가 총리대신직을 사임한 것은 한반도의 유화정책을 비판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한반도의 무엇을 바꿨을까요?그는 여순으로 재판을 받았고 암살 이유 진술로 15가지 이유를 열거하고 있습니다.이토와 관련이 있는 항목이나 전혀 관련이 없는 항목도 많이 있습니다.그의 죄명은 살인죄입니다.
안사근이 사용한 브로닝 총은 7발 장전.현장검증에서는 13발의총탄 가 발견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한계 - 병합 당시 모든 것이 부족했던 한반도.
1805년 조선의 유교학자 정동유(鄭東愈)는 한반도에 없었던 것으로 양, 바퀴, 바늘을 꼽았다.바퀴는 나무를 변형하여 가공하는 기술을 의미하고 바늘은 금속의 정밀 가공을 의미한다.당시 한반도에는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어 짐은 소의 등이나 사람이 어깨나 머리 위에 메고 운반하고 있었다.바늘에 대해서도 금속의 끝을 뾰족하게 하고 뒷부분에는 실을 꿰뚫을 구멍을 만들어야 했으며, 이들은 중국에서 들여왔다.
1894년부터 1897년까지 3년간 4차례 한반도를 여행한 이사벨라바드는 서울로 가는 길은 소가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가늘고 미로 같았다며 식별 가능한 정도의 통로일 뿐이라고 썼다.가로 두 바퀴 이상의 차량이 없었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산업혁명은 큰 기계를 제작하고 대량으로 상품을 제조한다.산업기계를 만들려면 나무 가공기술이나 금속 가공기술은 필수다.그리고 제품을 각 지역으로 운반하기 위한 유통이 필요하다. 원자재나 상품을 운반하는 차, 원래 길이 있어야 한다.작업원에게 작업공정을 전달하거나 제조기록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화폐경제가 없으면 제품을 만들어도 거래도 할 수 없다.당시 한반도에는 산업혁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없었다.
일본은 한반도에 산업기계, 자동차, 도로, 학교교육 등을 도입했다.신분제도를 철폐하고 노비를 개방하여 유동적인 노동력을 창출하였다.그로 인해 대량생산, 광역유통, 화폐와 상품을 교환하는 화폐경제가 생겨났다.이것이 일본이 한반도에 가져온 산업혁명과 근대화입니다.
김옥균과 미야자키 도도천일전쟁 전에 일본에서는 청나라에 대한 분노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손문이나 김옥균과도 교류가 있어 신해혁명을 뒷받침한 미야자키 도도텐의 저서 『33년의 꿈』에는 김옥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김옥균 참살 소식은 일본 전역을 크게 놀라게 했다.
문제는 청·조선 양국의 김옥균 암살이 일본 전역에 예상을 뛰어넘는 분노의 폭풍을 일으켰다는 점이다.그래서 때마침 조선 전라도에 발생한 동학당의 난이 확산된 것과 맞물려 이를 큰 트리거로 한 청일 개전 시계가 급격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아사쿠사 혼간지에서의 김옥균 본상이 메이지 27년의 5월 20일, 청일전쟁의 화투가 끊어진 것이 8월 1일. 그 사이, 불과 2개월 조금, 「쏘아라 응징이나 청국」의 대합창은 순식간에 청일 양국 개전으로 치닫고 만 것이다.
김옥균은 일본형 문명 개화를 목표로 한 조선인으로 갑신사변으로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민비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입니다.
쿠데타는 좌절되어 삼일천하라고 불렸고, 그 후 일본으로 망명합니다.거기서 이누요타케시나 미야자키 도도텐, 후쿠자와 유키치등의 지원을 받아 친교를 돈독히 합니다.그러나 김옥균은 민비에 준 옛 친구에게 속아 상하이로 향했고, 그곳에서 암살당합니다.
사진은 당시 신문 기사에서 일본인이 본 것입니다.김옥균은 자신의 혁명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죽은 모습이 일본인들을 움직이며 한반도를 독립으로 이끌었다.
청일전쟁의 원인은 동학당의 난이라고 하는데, 그 전에 김옥균의 암살로 인해 일본 국민들의 청나라에 대한 적의는 충만했음을 미야자키 도도천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일 병합기에 세워진 명동예술극장.당시의 이름이 메이지좌라는 것을 한국인들은 많이 알지 못한다
명동예술극장은 메이지마치에 있던 메이지좌 이다.메이지초는 현재의 명동이 되었고 메이지좌에서는 많은 영화와 연극이 개봉되었다.
1937년 4월 24일에는 세이미네 영화각과 신흥 키네마가 합작해 이규환(한국어판)과 스즈키 시게요시가 공동 감독한 한국어로 된 첫 토키 나그네(한국어판)(일본 개봉작 여정)가 이 관에서 개봉했다.
동관에서는 일본어판 상영이었지만, 같은 날, 부내의 우미관에서는 한국어판이 공개되고 있다.국내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의 개봉관 역할도 하며 1940년 8월 6일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등록금(감독 최인규), 1941년 2월 19일 동아영화사가 제작한 영화 지원병(감독 안석영)이 이 관에서 개봉했다.
노예가 영화를 보는 것일까.봤다면 이미 노예는 아닐 것이다.그래도 노예가 됐다면 일본은 일부러 노예를 위해 영화를 공동 제작해 보여줬을까.
그래도 이미 대우가 노예가 아니다. 노예가 휴일에 영화보러간다 . 휴일이 있는가.신기하다。
당시 한국인 영화감독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은 상당히 과거에 영화를 보고 있는 셈이다.왜 노예가 영화를 찍을 때까지 영화를 보고 공부할 수 있었을까.아니면 일본 영화사에라도 취직했을까.
일본통치시대 한반도는 근대화되고 나라가 날로 풍요로워지는 것을 실감하는 시대였습니다.
파리국제회의장서 제출된 인종차별철폐법안 세계최초 일본 제안 1919년 일본은 파리에서 세계 최초로 국제회의장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제안했다.참가국들은 깜짝 놀랐다.그런 발상이 없었기 때문이다.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국제적 위상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1920년 발족하는 국제연맹에서는 상임이사국이 된다.
그 전 단계 회의장에서 무슨 말을 꺼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일본의 설득에 의해, 앞으로 한 걸음에 가결이라고 할 때에 미국의 맹반발을 받아, 가결에는 이르지 못했다.미국은 노예제도보다 우위에 있는 경제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은 아시아 각국의 식민지 현황을 우려해 그 비판을 통해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대동아공영권 구상이란 무엇인가.그것은 아시아 개방과 백인 지배의 배척이었다.
일본은 쑨원의 중화민국 건국을 돕고 김옥균을 지원했다.김옥균의 삼화주의는 일본 조선 중국이 불가침의 독립을 유지하고 국력을 높여 백인 지배와 맞선다는 생각이다.
그 밖에도 아시아 각국에서 일본으로 유학 온 장래의 지도자들이 있었다.일본은 아낌없이 근대화의 혜택을 전했다.청일전쟁에서의 한반도 독립도 마찬가지다.이토 히로부미는 한국통감 퇴임 때까지 한반도 독립론이었고 병합 전년까지 유지되었다.
한반도 이외의 아시아 국가들은 이러한 것들을 잘 알고 있다.그래서 현재까지도 친일이다.대만에서 종군한 사람들은 지금도 아시아 개방 싸움에 참가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어떤 전쟁도 옳은 것은 아니지만 싸우는 데는 이유가 있다.패배하더라도 그 이유야말로 중요하다.미일의 시각에서는 정반대일 것이고 한국의 시각도 다를 것이다.아시아 시점에서 보면 많은 것들이 보인다.
두 번째는 1943년 대동아회의 기념사진
일본 : 도조 히데키
중화민국: 왕조밍
만주국: 장경혜
필리핀 공화국: 호세 라우렐
버마 국가: 바 모우
태국 왕국 : 원 와이타야콘
인도: 찬드라 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