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 강요받았다는 새빨간 거짓말 - 일본명 탐낸 한반도
2022-07-05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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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제도와 신분제도 폐지
일제 강점기에 호적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씨조선시대에는 성을 가지지 않고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는 천민에게도 성을 붙여 신분기재를 불필요하게 등록하였다. 이에 따라 신분제도는 폐지된다.한반도 호적의 기재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에서 채용된 호적 #ol2 #
본적
전호주
호주와의 속병
아버지의 성명
어머니의 성명
호주의 속병
호주의 본관
호주의 성명
호주의 생년월일
모-기재사항은 호주에 같음은 호주에 같음
아내-기재사항은 호주와 같음
자손 등의 친족-기재사항은 호주와 같다.
동 배우자 - 기재사항은 호적주와 같음
조선 풍습을 배려한 제도
7.의 본관은 한반도 특유의 씨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이걸 유지했어.일본 본국의 호적에는 7개 항목이 없다.동성불혼 원칙은 한반도 특유의 제도로 이를 유지했다.사위 양자 제도는 일본을 본떠 도입되었다.여성 호적주가 인정될 수 있도록 변경하였다.창씨개명이란 무엇인가 하면 한반도는 유교를 신봉했기 때문에 부부별성이다.이것을 일본식 가족을 나타내는 씨를 창설하려는 시도이며, #gren #신청제 #/gren #였다.게재한 화상에는 그 사실이 설명되어 있다.조선 이름을 빼앗는 것도 아니고 성이 없는 사람에게 성을 주고 신분 기재를 폐지했다.그리고 애초에 강제는 아니다.
학교 교육제도 보급
신분제를 폐지함으로써 신분 격차 없이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게 됐다.학교 교육 제도의 도입은 모든 어린이에게 교육 환경을 정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1911년 6.3%인 초등교육 여자 취학률이 1941년에는 #ylow #33.1%로 증가 #/ylow #하였다.
당시 내무관료 오쿠노 세이료의 발언
자민당 총무회에서 노나카 히로무가 아소 발언(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요구했다고 한 발언)을 비판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오쿠노 세이료가 「노나카군, 자네는 젊으니까 모를지 모르지만, 아소군이 말하는 것은 100% 정답이야.조선 이름 그대로라면 장사하기 어려웠다.그러한 호소가 많았기 때문에, 창씨 개명을 단행했다.도장을 찍은 사람은 내무관료, 이 나야 "라고 발언했다.
만주에 퍼지는 조선족
지금도 당시 만주 지역에는 많은 조선족이 살고 있지만 조선 북부는 농업에 적합하지 않아 홍수와 가뭄을 거듭하고 있었다.일본의 영향이 확대되면서 농지를 찾아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것이다.조선인이라고 하면 만주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 이름을 원했다.일본인이라면 큰 얼굴이 생긴다 는 것이다.
아울러 읽고 싶다
중국 동북부에 펼쳐진 조선족 지역 - 국경 개념이 명확해진 것은 청일전쟁 이후
광역에 분포하는 조선족
요동반도는 삼국간섭의 대상으로
북부는 농업에 적합하지 않았다
일본명을 원했던 조선인
오족협화를 목표로 한 만주국
한일정부간 합의필
조선족(조선어족)이란 중국의 지린성, 헤이룽장성,랴오닝 성 등에 산재해 있다.이유는 간단했고 역사적으로 조선족은 이 일대에 살았기 때문이다.만리장성 바깥에 있는 지역으로 엄격한 국경 개념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 소수민족으로서 조선족이 한복을 입고 연출을 했던 것은 기억에 새롭다.
고구려 시대 조선족의 거주지역은 요동반도에 이르고 있다.청일전쟁 강화 때 일본은 요동반도 영유를 주장했다.그것은 요동반도가 조선 땅이라는 생각과 중국에 대한 전략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베이징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것에 위기감을 가진 프랑스, 독일, 러의 3국 간섭으로 인해 이를 포기하게 되었다.
이때 비로소 조선의 영토, 국경이라는 개념이 생겼다고도 할 수 있다.일제 강점기 조선 북부는 농업에 적합하지 않고 공업을 중심으로 개발되었다.조선 남부는 농업 주체로 하고 있다.
북부 농민들은 만주 지역에 농지를 찾아 이주를 한다.만주는 비도 내려 조선 북부보다는 농사짓기에 적합했다.이 근처는 만주족이 지주로 존재하고 있어 많은 트러블이 빈발했어.
그래서 북부 조선인들은 일본 이름을 무척 탐냈다.왜냐하면 일본 이름을 대면 만주인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후 유조호 사건을 거쳐 만주국 건국이 된다.만주국의 건국 이념은 일본인·한인·조선인·만주인·몽고인의 오족협화이다.
이로써 조선인들은 박해를 받지 않고 안전이 확보되었고 농지는 대폭 확대되었습니다.만주국과 조선족의 거주지역을 비교하면 대체로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족협화를 노래한 만주국
만주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애신각라의를 황제로 한 일본의 괴뢰국가이다.당시에는 많은 일본인들도 이주했다.만주국의 건국 이념은 일본인·한인·조선인·만주인·몽고인의 #gren #오족협화 #/gren #로 되어 있다.즉 이 지역에는 크게 이들 오족이 공존하여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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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병합 반대파이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저지한 메이지 6년 정변 이토 히로부미 탄생 (1841년)
메이지 6년 정변(1873년) 이토오히로부미(32세)
정원구성원(국가의사결정기관)
정한론파 사이고오타카모리 에토오신히라이타가키테이스케 고토오쇼오지로 후지마타네오미
비정론파 산죠오미 이와쿠라구시 키도타카노스케 오오쿠보토시미치 오쿠마시게노부 오키타쿠토
당연하지만, 이토(伊藤)는 아직 젊고 정원의 멤버가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70년부터 발족한 「공부성」의 설치에 진력.공부성은 1871년 철도 조선 광산 제철 전신 등대 제작 공학 권공 토목 등 10개 기숙사와 측량 1개 업체로 편성됐다.
산조 미타마사 대신이 병에 걸렸을 때 정한론에 반대했던 이토의 이와쿠라를 의장으로 하는 아이디어로 정한론은 실패로 끝나고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600명의 사쓰마 번사는 정치세계에서 물러나게 된다.
강화도 사건(1875년) 이토오히로부미(34세)
측량이나 항로 연구를 명목으로 한반도에 군함을 파견해 군사적 위압을 가하는 방안에 대해 태정대신 산조 미나미는 이를 비판했다.그러나 해군 다이스케 가와무라 준요시의 건의에 따라 『운양』, 『제2정묘』 등 2척의 군함이 조선 연안에 극비리에 파견된다.강화도 사건의 발단이 된 운양의 함장은 사쓰마 번 출신 이노우에 요시카루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강화도 사건을 지시했다는 오해가 있는 듯하지만 일련의 흐름을 봐도 어디에도 이토의 글씨가 없다.철도를 만들면서 전함을 지시하겠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토(伊藤)가 이와쿠라(岩倉)와 오쿠보(大久保)의 신용을 얻게 된 것은 메이지 6 년의 정변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반도사를 정리한 것은 일본 - 그것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역사를 만든 한국.
한반도의 역사를 정리한 것은 일본이었다.그때까지 각종 문서는 그 자리에 보관돼 있을 뿐이었다.근대 역사학의 관점에서 체계화되었다.이나바 이와요시(稲葉岩吉)·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나카무라(中村栄孝) 에이타카 등 일본측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홍희(洪憙)·이능화(李能和)·최남선(崔南善)·이병도(李丙燾) 등 한반도측 지식인?문화인도 참여하며 그 수는 모두 41명에 이른다.일본 학자들은 한반도 지식인들에게 근대 역사학의 사고방식과 체계화 방법을 아낌없이 가르쳤다.
한반도 전역, 일본과 만주 등지에 채방하여 차용한 자료는 4,950점, 중요한 것을 골라 작성된 복본이 1,623권, 본문의 사료가 되는 헌책은 3,500권에 달한다.
전후 이들 역사책은 일제 치하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식민사관이라 부르며 배척당했다.대신 한반도인 스스로가 만드는 민족사관이라는 것이 대두되면서 학교 교육에 도입되었다.역사학자뿐 아니라 친일 청산, 적폐 청산으로 친일파는 사회에서 배척당했다.이 민족사관이라는 것이 지금으로 이어지는 근거불명의 역사로 올라선다.
이것들은 역사 편집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일본으로부터 가져온 근대적인 기술이나 학문은 전후 일본이 가져온 것으로서 배척되어 간다.거기에 몸담았던 사람들도 일정 잔재로 배척되어 가는 것이다.
뒤집어 보면 한일 병합 시 한반도 발전을 도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전후 출발점에서 반론자를 배제함으로써 성립된 역사학은 애초 학문적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객관성이 없는 민족사관의 계속되는 이야기를 현재 한반도 어린이들이 배우고 있다.
순종황제 칙유와 한일병합의 진실 취미 당구에 흥하고 밤에는 축음기를 듣는 생활
1909년에 들어서자 한일 병합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이완용 총리는 일진회 등 친일파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일본 정부와 한국 병합 이야기를 진행하였고 융희 4년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을 조인하였다.
8월 29일 양국 황제의 재가로 조약은 발효되어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 조선총독부의 통치하에 들어갔다.아래에 게재하고 있는 것은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가 한반도를 향해 발한 칙유로 신문에도 게재된 것이다.
한일병합에 대해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칙유나는 방대한 일을 하여 즉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정령에 노력해 왔으나 아직도 길은 험하고 나라는 약화되고 피폐가 도처에 발생해 망연하다. 이 상황을 수습시킬 수는 없다.오히려 대임을 맡기고 완전한 방법과 혁신적인 공적을 얻어야 한다.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결단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우리 국민의 생활과 안전을 확보한다.국민은 국세와 시세를 심찰하고 혼란 없이 대처하며 일본제국 문명의 신정에 복종하고 그 행복을 누리라.나는 결코 국민을 잊은 것이 아니다.국민을 구하고 살리기 위한 진의에서 나온 것이니 이를 잘 이해하라.융희 4년 8월 29일
병합 후 순종(李坧)은 경성부 창덕궁에서 살다가 왕으로 책립되어 이왕으로 칭해졌다.병합 전에는 심신이 쇠약해져 시종에 의지하지 않으면 보행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이 무렵에는 보행이 가능해지면서 쾌활하게 응대하게 되었다.테라우치 마사키는 「국사다난의 심통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고 있다.
이왕은 매우 신경질적이어서 기상 목욕 취침 시간은 스스로 시계를 보고 제시간에 했다.평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취미인 당구에 흥했고 밤에는 축음기를 듣는 생활을 했다.
또 아버지 이태왕이 된 고종만큼이나 기억력이 뛰어나 알현자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제국호텔 초대 주방장을 지낸 요시카와 가네요시 부자의 프랑스 요리를 좋아해 거의 매일 먹고 있었다.
1917년 6월에는 일본을 방문, 10년 전 방한한 다이쇼 천황을 알현하는 형식으로 재회했다.11월에는 창덕궁 대부분이 소손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불에 탄 낙선재라는 건물로 옮겼으나 비좁았다.
이완용은 이태왕이 사는 덕수궁으로 이전하는 것을 생각했으나 이를 들은 이완용은 "천황폐하께서 주신 창덕궁이니 움직이지 않겠다"며 이완용을 질책했고, 이후 2년간 창덕궁 중수가 끝날 때까지 낙선재에서 살았다.
이왕직 사무관 곤도 시로스케는 이왕이 창덕궁의 궁호에 따라 이왕가의 제사가 유지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은 억지로 한일병합을 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순종의 칙유나 이후의 생활이나 언동을 보고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을 독립국으로 취급한 북일 수호조규 천황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이 시대부터 변함이 없다
1876년 체결된 북일수호조규는 불평등조약이라는 측면이 있으나 조선을 독립국으로 한 최초의 조약으로 조선왕조 개국의 계기가 되었다.강화도 조약라고도 불린다.북-일 간에는 에도시대에는 조선통신사에 의한 국교가 있었지만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메이지천황의 국서를 조선은 받지 않았다.
이유는 도쿠가와와는 대등한 관계였는데도 도쿠가와를 신하로 하는 천황의 존재는 조선왕조를 격하에 위치시키는 라는 이유나 종주국 청나라 황제에 대해 천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여기서 북-일은 단교 상태가 된다.
지금도 한국은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릅니다.천황의 칭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 시대에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875년 일어난 북-일 간 무력충돌인 강화도 사건을 거치면서 일본은 사죄 요구 등을 포함해 청나라에 대해서는 종주국이라면 책임지라고 요구한다.이에 대해 청은 조선은 속국이지만 다른 민족, 다른 정치형태를 갖고 있으며 청은 책임이 없다 라고 밝히고 있다.이를 바탕으로 북-일 수호조규 제1관에는 '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과 평등의 권리를 가진 국가로 인정한다.'고 기재되게 된다.
청나라의 속국이기는 하지만 독립국가로서 다소 모순되는 점을 포함하면서 양자 국교가 시작된다.이후 1894년 발발하는 청일전쟁을 거쳐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의 나라임을 확인하고 독립자주를 손해보는 조선국으로부터 청국에 대한 공·헌상·전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고 기재되어 명실상부한 조선은 독립국이 되었다.이 조약을 체결한 일본 측 책임자가 이토 히로부미이다.
조선은 수백 년래 독립국이 아니었습니다.독립국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일본입니다.
한자를 배우는 일본 한자를 폐지한 한국 문자를 폐지함으로써 과거사가 블랙박스에
한자를 읽지 못하고 역사를 읽을 수 없다
한국의 독자적인 문자 한글
과거사 원문을 읽는 일본인
역사정보를 특권계급이 독점?
한국은 1970년 한자를 폐지했다.오선화씨는 당시를 돌아보며 1970년 봄이면 모든 교과서에서 한자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민족의 문자를 쓴다는 이유 같지만 결과를 보면 한국인들은 과거 문서를 읽을 수 없게 됐다.과거 한자가 사용되어 기록된 일체의 역사를 읽을 수 없다.
한글은 일본에서는 표음문자라고 불리는데, 정확히는 음절문자가 된다.한자의 한 글자 음독을 한글 한 글자로 대체한 것이다.그래서 동음이의어는 같은 한글 문자로 표현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지 알 수 없다.이것은 일본의 히라가나 표기와 같을 것이다.
과거사를 인터넷으로 조사해도 좀 더 원문, 전문을 일으킨 기사를 찾아 결과적으로 공문관 원문을 확인하기도 한다.공문관에서는 공개된 과거 공문을 원본 친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안중근의 자서전도 그의 친필 그대로 공개돼 있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 회상 부분도 읽을 수 있다.그런 과정 속에서 인터넷 리터러시가 유지되는데 한국에서는 어떨까.
한글로 자의적으로 쓰인 정보에만 노출돼 원문을 스스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 일반에 문자가 보급되지 않은 것은 특권계급이 정보를 독점했기 때문이다.노비에게 문자나 정보는 필요 없다.한자 폐지로 무엇이 초래되었는가 하면 과거사가 특권계급의 전유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공문서는 모두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원본 그대로 공문서에 보관되어 있으며 현재는 인터넷으로도 열람이 가능하다.한자를 읽을 수 있다는 특정 한국인만 접근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대로 한자를 읽을 수 있다면 한국 정부는 곤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