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아들 안준생과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후미요시는 하쿠분지에서 화해.
2020-05-21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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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하러 온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한국의 박문사에 1939년 10월 15일 한 인물이 공양하러 왔다.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다.상하이에서 온 한반도인 만선시찰단에 참가해 방문한 것이었다.
공양은 11시부터 시작됐으며 이토 히로부미 초상화 옆에는 안중근의 위패도 놓여 있었다.안준생은 아버지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를 공양했고, 독경한 고마다는 안중근의 위패를 그에게 건네며 두 영혼을 영원히 추모하라고 타일렀다.
아울러 읽고 싶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 수수께끼 - 안중근의 배후에 누가 있었나?발견되지 않은 블로닝 총의 총탄.
암살 전 한일병합은 각의결정
7발 장전된 총에서 13발이 발사?
기병총 탄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러시아는 이토의 방문을 환영
러일의 혼란은 로마노프의 실수?
사라예보 사건에서도 사용된 총
공통점은 2점밖에 없다
이토의 얼굴을 몰랐던 안중근
이토의 눈앞까지 홀로 다가온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한일 병합을 앞당겼다는 얘기를 듣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이유는 1901년에 이토는 러시아 이권의 남하를 책임지고 총리대신직을 사임한 바 있다.가쓰라 내각에서 한일병합에 대한 방침을 밝힌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 단행 방침 및 대한시설 대강령'의 각의 결정은 암살 전인 7월로 되어 있다.이에 따라 7월 이토(伊藤)는 한국통감을 은퇴했다.이토(伊藤)의 암살은 같은 해 10월 26일이다.
안중근의 브로닝 총탄은 이토의 체내에서 발견되지 않았다.사건으로 인해 발포된 총탄은 13발.피탄자는 다음과 같다.
이토 히로부미 3발, 무로다 요시후미 5발, 나카무라 고레코 2발, 모리 타이지로 1발, 카와카미토시히코 1발, 다나카 신지로 1발.
브로닝 총은 7발 장전된 총이다.이토(伊藤)의 체내에서는 프랑스제 기병총 2탄이 발견되어 1발은 관통하고 있었다.안중근이 이토를 잘못 쳤을 때 작전을 보완하기 위해 하얼핑역 지붕, 2층 부분 등에서 저격하고 있다.왜 2층 부분이냐면 사법해부에 의한 탄도를 봐도 오른쪽 어깨에서 배꼽을 향해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안중근에 의한 충동적 단독범이 아니라면 주모자는 누구냐는 얘기다.
일본 내부의 정치항쟁이 원인이라는 설은 서두의 이유에서 있을 수 없다.일본 내에서는 정치적 매듭도 절차도 이미 붙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토의 방문을 환영한다.
러시아설은 러시아의 이점으로 볼 때 생각하기 어렵다.이토(伊藤)의 목적은 러시아의 복권을 돕기 위한 무역협정을 맺는 것이었다고 한다.꼬꼬꼬댁을 만나러 하얼핀에 갔고 꼬꼬댁도 대환영했다.
애초 러일개전을 목적으로 한다면 정치적 실권이 없는 이토를 암살하는 것은 빗나간 일이다.그리고 러일전쟁이 끝난 지 불과 4년 만에 다시 개전 등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얘기다.
레닌설이라는 게 있어.논거는 다음과 같다.레닌은 로마노프의 추문을 긁어 모으고 있었다.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는 레닌에게 큰 계기가 됐다.로마노프 왕조의 대실수로 러시아 국내에 대량의 전단을 살포하고 있다.
제1차 대전의 계기가 된 오스트리아 대공 암살(사라예보 사건)에도 브로닝 총이 사용됐다.브로닝 총은 러시아 육군이 채용하는 총이다.그리고 레닌은 브로닝총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
이 설에서의 공통점은 브로닝총과 로마노프의 범행으로 가장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코민테른의 전략은 스스로 싸우지 않고 사회를 선동하는 것이 상투수단이기도 하다.다른 나라끼리 전쟁을 시키는 것도 포함된다.
러일전쟁 종결이 1905년, 이토 암살이 1909년, 사라예보 사건이 1914년이다.그리고 러시아 혁명은 1917년.제1차 세계대전 중 혁명을 완수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대해 주모자는 수수께끼 속이다.다른 각도에서 보면 현장에 남은 것은 안중근과 브로닝총뿐이었다.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모른다. 진술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자서전에도 분명히 그 자신이 쓰고 있다.암살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그 장소에는 이토 이외에도 동행한 일본인도 여럿 있었고 러시아인도 있었다.애초부터 기병총을 든 저격수들은 준비를 했고 예정대로 사격을 했다 .
안중근이 이토의 눈앞까지 갈 필요성은 있었을까.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안중근에게 주변의 주의를 끌고 멀리서 저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현장에는 안중근과 브로닝 총만 남게 된다.
이후 안준생은 취재차 찾은 기자에게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30년간 제사를 게을리 했다.지금 이토(伊藤) 공의 명복을 비는 동시에 아버지의 위패를 받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16일 안준생은 경성조선호텔로 향한다.그것은 어떤 사람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조선호텔에서의 화해
그 상대는 이토 후미요시.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인 .이토 후미요시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다는 안준생의 제의에 대해 이토 후미요시는 우리 아버지는 이미 신이 되어 부처가 되어 하늘로 돌아갔다.지금 무엇을 사과할 필요가 있을까.그보다는 나라를 위해 성의를 다하자."고 답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7일 이토 후미요시와 안준생은 박문사를 찾아 서로의 아버지에 대한 교환 공양을 올렸다.
POINT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안중근의 아들과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후미요시는 1939년에 이미 화해를 했습니다.후미요시는 함께 나라를 위해 성의를 다하자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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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안중근 지바 17 현창비 간수였던 지바가 받은 안중근의 유묵 지바 17은 미야기 현 구리코마 정 사루헤이 출신으로 당시 육군 헌병으로 뤼순옥 중 안중근을 간수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27세 청년이었다.사형을 눈앞에 두고 절절히 말하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민족독립에 대한 비원에 지바는 깊은 마음을 움직였다.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 경애하는 마음으로 맺어졌고 사형집행 5분 전 안중근은 지바에 일엽서를 써 보냈다.순국헌신 군인 본분 지바는 유묵을 귀국할 때 몰래 고향으로 옮겨 유족들도 눈을 피해 보관하고 있었다.
1979년 안중근 탄생 100주년, 사망 70주년을 맞아 지바 유족이 이 유묵을 도쿄 한국연구원에 증정했다.현재는 한국의 국보로 안중근 의사숭모관에 모셔져 있다.현창비는 한일 양국의 우호를 기원하며 지바의 고향에 세워졌고, 지바의 무덤 옆에도 비석을 세웠다.
일제강점기 이후 대만과 한국이 정반대인 이유 독립선서 건국 정신에 큰 차이
대만과 한국은 왜 이렇게 다른가
군사정권으로서 시작된 공통점
친일세력이 폭동을 일으킨 대만
대만, 한국은 공통점이 많지만
장제스 8.15 연설
이승만 3.1 임시정부 헌장 선서문
대만과 한국이 너무 다른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 보면 국민성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거기에 답이 있었다고 해도 해결책이 없으니 의미가 없다.
한반도 분할은 따지고 보면 냉전구조 속에서 태어나면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구도가 아니다.군사독재정권과 사회주의의 대립이라는 이상한 구조로 되어 있다.
대만을 둘러봤을 때 어떤가 하면 역시 중국 공산당과 대치한 국민당의 나라이고 일당독재제이며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대만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일제 잔재라 하여 일본에 협력한 인간들을 차례로 숙청, 배제하였다.대만에서는 니니팔 사건이 일어나 친일 세력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곳은 크게 다른 점이지만 이후 국민당 정부는 재발을 우려해 본토 지식인과 공산주의자들을 차례로 숙청했다.숙청이라고 해서 같은 줄 알았는데 친일세력 숙청이라는 게 없었는지 여러 가지 조사를 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한국과 대만은 공통점이 많다.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종전 후 건국도 사회주의와 대치하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한국은 북한과 대치했고 대만은 중국 공산당과 대치하고 있었다.그리고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분명히 다른 점으로 장제스의 8월 15일 연설이 있다.이하에 게재합니다.
장제스 8.15 연설
우리 중국(대만) 동포들은 구악을 생각하지 않고 남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우리 민족 전통의 높고 값진 덕성임을 알아야 합니다.우리는 일관되게 일본 인민을 적으로 삼지 않고 오직 일본의 횡포 무도한 무력을 가진 군벌만을 적으로 생각한다고 밝혀왔습니다.오늘 적군은 우리 동맹국들이 공동으로 타도했습니다.그들이 투항 조항을 모두 충실히 실행하도록 우리가 엄격하게 독려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단, 우리는 보복해서는 안 되며, 하물며 무고한 인민에게 오욕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그들이 스스로의 잘못과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나치 군벌에 의해 우롱당하고 끌려간 것을 우리는 자애롭게 대할 뿐입니다.만약 제멋대로의 적이 행한 폭행에 대해 폭행으로 대답하고, 지금까지의 그들의 우월감에 대해 노예적 굴욕으로 대답한다면, 복수는 원수를 부르고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의 싸움의 목적으로 하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이는 우리 군민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날 각별히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다음으로 이승만의 3.1 임시정부 헌장 선서문을 게재한다.
이승만 3.1 임시정부헌장 선 맹세문 존경하고 열애하는 우리 2000만 동포 국민에게 민국 원년 3월 1일 우리 대한민족이 독립을 선언할 때부터 남녀 노소, 모든 계급, 모든 종파는 물론 일치단결하여 동양의 독일인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 아래 지극히 공명하게 지극히 인욕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며 실사와 정의와 인도를 애호하는 국민성을 표현하였으니 지금 세계의 동정이 부연히 우리 국민에게 집중된 것이다.이때에 본 정부가 전국민의 위임을 받아 조직된 것이다.본 정부가 전 국민과 함께 전심하여 육력하고 임시헌법과 국제도리가 명하는 바를 준수하여 국토광복과 국기확국의 대사명을 다할 것을 지렛대로 선서한다. 동포 국민이여, 분발하라.우리가 흘린 피 한 방울이 자손 만대의 자유와 복영의 값이다.하나님 나라 건설의 귀중한 기초인 것이다.우리 인도가 바로 일본의 야만을 교화하는 일 것이다.우리의 정의가 바로 일본의 폭력보다 앞선다.동포여 일어나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자 .
장개석도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나치를 인용하고 있지만 지향하는 길이 전혀 달랐음을 잘 알 수 있다.이것이 양국의 미래를 크게 가른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헌법 전문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으로서 임시정부 선서가 있습니다.거기에는 「우리의 정의가 바로 일본의 폭력보다 앞선다.동포여, 일어나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라."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조선을 독립국으로 취급한 북일 수호조규 천황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이 시대부터 변함이 없다
1876년 체결된 북일수호조규는 불평등조약이라는 측면이 있으나 조선을 독립국으로 한 최초의 조약으로 조선왕조 개국의 계기가 되었다.강화도 조약라고도 불린다.북-일 간에는 에도시대에는 조선통신사에 의한 국교가 있었지만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메이지천황의 국서를 조선은 받지 않았다.
이유는 도쿠가와와는 대등한 관계였는데도 도쿠가와를 신하로 하는 천황의 존재는 조선왕조를 격하에 위치시키는 라는 이유나 종주국 청나라 황제에 대해 천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여기서 북-일은 단교 상태가 된다.
지금도 한국은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릅니다.천황의 칭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 시대에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875년 일어난 북-일 간 무력충돌인 강화도 사건을 거치면서 일본은 사죄 요구 등을 포함해 청나라에 대해서는 종주국이라면 책임지라고 요구한다.이에 대해 청은 조선은 속국이지만 다른 민족, 다른 정치형태를 갖고 있으며 청은 책임이 없다 라고 밝히고 있다.이를 바탕으로 북-일 수호조규 제1관에는 '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과 평등의 권리를 가진 국가로 인정한다.'고 기재되게 된다.
청나라의 속국이기는 하지만 독립국가로서 다소 모순되는 점을 포함하면서 양자 국교가 시작된다.이후 1894년 발발하는 청일전쟁을 거쳐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의 나라임을 확인하고 독립자주를 손해보는 조선국으로부터 청국에 대한 공·헌상·전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고 기재되어 명실상부한 조선은 독립국이 되었다.이 조약을 체결한 일본 측 책임자가 이토 히로부미이다.
조선은 수백 년래 독립국이 아니었습니다.독립국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일본입니다.
이승만은 일본을 싫어하고 역사를 새로 썼다 현 정부가 '더 나은 정부'로 만들기 위해 반복된 숙청
종전 후 한국 정부가 가장 싫어했던 것이 일본 시대가 더 나았다는 말일 것이다.실제로 대만에서는 2.28사건이 일어나 친일파가 폭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승만 전 대통령도 그 사건을 듣고 경계했을 것이다. 2.28사건은 1947년에 발발했고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되었다. .대만에서 이때 내려진 계엄령은 38년이나 됐다.
건국 후 바로 이뤄진 것이 친일 배제다.일본 통치를 그리워했을 뿐 공산주의자 등과 마찬가지로 정치범으로 간주돼 체포 투옥됐다.건국 이래 불과 2년 만에 무려 일제 강점기 35년간의 체포자 수를 넘어선 것이다 .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의 대부분을 국외에서 보냈기 때문에 실제로 일본 통치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니다.그냥 일본이 너무 싫었다.이승만이 미국으로 망명하던 시절에는 일제 강점기 이전의 이씨 조선이 동양의 이상국가라고 선전했을 정도였다.
대만에서는 일본 통치가 끝났지만 그곳에 온 것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이었고 그 정치는 끔찍했다.한국에서도 일제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나라를 잘 통치 운영할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일제강점기에 나라 운영에 종사했던 사람들을 일제 잔재로 속속 추방해 갔으니 정치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 집단이 정치행정을 맡는 셈이다.이 밖에 북한과 결탁해 국가 전복을 노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숙청, 학살도 많이 자행되고 있다.
군사정권으로 출범한 대한민국에 국가운영의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은 친일이자 공산주의자였다.그것들을 히스테리적으로 배제해 간 한편, 보도연맹 사건 외, 제주도 4·3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등 정부 실정 비판의 눈을 돌리기 위해서도 반일이 사용되었다 .
보도연맹 사건공산주의자와 그 가족들을 재교육하는 시설에서 자행된 학살사건.
제주도 4·3사건 미 육군사령부 군정청 지배하에 있는 남조선 제주도에서 일어난 폭동에 대해 학살이 자행된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625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한국의 국민방위군사령부 간부들이 국민방위군에 공급된 군사물자와 군량미 등을 빼돌렸다.횡령으로 9만여명의 한국군 병사가 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사도 새로 썼다.이승만 자신이 일제강점기를 모르니 역사를 새로 쓰는 것은 오히려 쉬웠다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는 착취당하고 노예화되었다는 역사관은 한국 건국 후 국내 정치가 잘 되지 않더라도 일본 통치 시대보다 훨씬 낫다는 가공의 '더 나은 정부'를 만든 것이다 .
그 역사관을 사회통념화하기 위해서는 일본 통치를 긍정하는 것만으로도 정치범이 되는 셈이다.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사회통념과 교육을 지금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승만과는 도대체 누구인가 - 일본통치시대를 일절 모르는 반일초대대통령 - 3.1독립운동과도 관련없음.
이승만은 친일 개화파?
독립문은 어디로부터 독립했을 때의 것일까
일제강점기를 모르는 이승만
미국 괴뢰정권으로 출범한 반일정부
일본에서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보면 신기한 점이 많다.조사해 보니 서재필의 독립협회 설립 멤버이기도 했던 것 같다.서재필이라고 하면 청일전쟁 이후 서울 독립문을 만든 중심인물이며,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일으킨 즉 친일 개화파이다.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해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 친분을 쌓았고 상하이에서 민비로 향하던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 독립된 문으로 바뀌었을까.독립문은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가 독립한 것을 기뻐하여 서재필 및 독립협회가 설립한 것이지만 지금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문이라고 한국인들은 완강히 믿고 있다.
1897년 고종의 퇴위 요구 전단 살포를 실시하여 투옥되었으며 1904년 출옥 후 1919년까지 미국에서 살았고, 3.1독립운동에도 관여하지 않았다.3.1운동의 기운을 받아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립했든 파벌항쟁에서 실각한 지 불과 1년 만에 하와이로 이주해 있다.즉 1904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미국에 살면서, 즉 일본 통치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이승만의 전후 한반도 통치는 바로 미국 시각의 통치였다고 볼 수 있다.그것은 한일 병합부터 한반도의 근대화 등에 대해서는 전혀 빈칸으로 되어 있다.그는 러일전쟁조차도 미국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의 정책은 GHQ의 정책과 연결되어 있었고 미국 내에서의 반일 감정과도 완전히 연결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어쨌든이승만 시대에 반일 구조의 토대는 구축되었고 현재에 이른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