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이후 대만과 한국이 정반대인 이유 독립선서 건국 정신에 큰 차이
2022-02-18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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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과 한국은 왜 이렇게까지 다른가
대만과 한국이 너무 다른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 보면 국민성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거기에 답이 있었다고 해도 해결책이 없으니 의미가 없다.
군사정권으로서 시작된 공통점
한반도 분할은 따지고 보면 냉전구조 속에서 태어나면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구도가 아니다.군사독재정권과 사회주의의 대립이라는 이상한 구조로 되어 있다.
대만을 둘러봤을 때 어떤가 하면 역시 중국 공산당과 대치한 국민당의 나라이고 일당독재제이며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대만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친일 세력이 폭동을 일으킨 대만
한국에서는 일제 잔재라 하여 일본에 협력한 인간들을 차례로 숙청, 배제하였다.대만에서는 니니팔 사건이 일어나 친일 세력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곳은 크게 다른 점이지만 이후 국민당 정부는 재발을 우려해 본토 지식인과 공산주의자들을 차례로 숙청했다.숙청이라고 해서 같은 줄 알았는데 친일세력 숙청이라는 게 없었는지 여러 가지 조사를 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대만, 한국은 공통점은 많지만
한국과 대만은 공통점이 많다.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종전 후 건국도 사회주의와 대치하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한국은 북한과 대치했고 대만은 중국 공산당과 대치하고 있었다.그리고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아울러 읽고 싶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다른 점으로 장제스의 8월 15일 연설이 있다.이하에 게재합니다.
장제스 8.15 연설
우리 중국(대만) 동포들은 구악을 생각하지 않고 남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우리 민족 전통의 높고 값진 덕성임을 알아야 합니다.우리는 일관되게 일본 인민을 적으로 삼지 않고 오직 일본의 횡포 무도한 무력을 가진 군벌만을 적으로 생각한다고 밝혀왔습니다 . 오늘 적군은 우리 동맹국들이 공동으로 타도했습니다.그들이 투항 조항을 모두 충실히 실행하도록 우리가 엄격하게 독려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단, 우리는 보복해서는 안 되며, 하물며 무고한 인민에게 오욕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그들이 스스로의 잘못과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나치 군벌에 의해 우롱당하고 끌려간 것을 우리는 자애롭게 대할 뿐입니다. 만약 제멋대로의 적이 행한 폭행에 대해 폭행으로 대답하고, 지금까지의 그들의 우월감에 대해 노예적 굴욕으로 대답한다면, 복수는 원수를 부르고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의 싸움의 목적으로 하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이는 우리 군민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날 각별히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다음으로 이승만의 3.1 임시정부 헌장 선서문을 게재한다.
이승만 3.1 임시정부헌장 선 맹세문
존경하고 열애하는 우리 2000만 동포 국민에게
민국 원년 3월 1일 우리 대한민족이 독립을 선언할 때부터 남녀 노소, 모든 계급, 모든 종파는 물론 #ylow #일치단결하여 동양의 독일인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 아래 지극히 공명하게 지극히 인욕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며 실사와 정의와 인도를 애호하는 국민성을 표현하였으니 지금 세계의 동정이 부연히 우리 국민에게 집중된 것이다.이때에 본 정부가 전국민의 위임을 받아 조직된 것이다.본 정부가 전 국민과 함께 전심하여 육력하고 임시헌법과 국제도리가 명하는 바를 준수하여 국토광복과 국기확국의 대사명을 다할 것을 지렛대로 선서한다.
동포 국민이여, 분발하라.우리가 흘린 피 한 방울이 자손 만대의 자유와 복영의 값이다.하나님 나라 건설의 귀중한 기초인 것이다.우리 인도가 바로
일본의 야만을 교화하는 일 것이다.우리의 정의가 바로 일본의 폭력보다 앞선다.
동포여 일어나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자 .
장개석도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나치를 인용하고 있지만 지향하는 길이 전혀 달랐음을 잘 알 수 있다.이것이 양국의 미래를 크게 가른 것인지도 모른다.
POINT 한국헌법 전문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으로서 임시정부 선서가 있습니다.거기에는 「우리의 정의가 바로 일본의 폭력보다 앞선다.동포여, 일어나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라."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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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서울독립문은 청일전쟁 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여 서재필이 건설한 것 그것조차 모르는 한국대통령
동학당의 난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조약에서 한반도의 독립이 명기되자 이를 기뻐한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청나라 복속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부수고 터 옆에 독립문을 세웠다.이것이 한국 서울의 독립문이다.
서재필은 김옥균의 소꿉친구로 일본 게이오대학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을 지향하지만 김옥균은 민비에 의해 보내진 자객에게 상하이에서 암살 당하고 모국으로 돌아와 시신을 토막토막 절단당해 각지에 버려지는 비참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한반도 내에 남은 서재필의 가족들도 민비 등에 의한 숙청 를 받아 차례차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됐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서명인은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입니다.독립문은 김옥균의 동지 서재필이 지은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독립문이 일제 강점기로부터 독립한 기념으로 지어진 문이라고 믿는다.그 문 앞에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뻐하는 인간이 문재인이다.대통령 출마 선언도 독립문에서 이뤄졌고 광복절에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뻐하듯 이 문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대통령의 역사인식이 이 정도면 한일관계가 개선될 리 없다.
한국에서는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해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의 날로 되어 있습니다.그날 독립문에서 기념촬영이라니 놀랍네요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병합 반대파이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저지한 메이지 6년 정변 이토 히로부미 탄생 (1841년)
메이지 6년 정변(1873년) 이토오히로부미(32세)
정원구성원(국가의사결정기관)
정한론파 사이고오타카모리 에토오신히라이타가키테이스케 고토오쇼오지로 후지마타네오미
비정론파 산죠오미 이와쿠라구시 키도타카노스케 오오쿠보토시미치 오쿠마시게노부 오키타쿠토
당연하지만, 이토(伊藤)는 아직 젊고 정원의 멤버가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70년부터 발족한 「공부성」의 설치에 진력.공부성은 1871년 철도 조선 광산 제철 전신 등대 제작 공학 권공 토목 등 10개 기숙사와 측량 1개 업체로 편성됐다.
산조 미타마사 대신이 병에 걸렸을 때 정한론에 반대했던 이토의 이와쿠라를 의장으로 하는 아이디어로 정한론은 실패로 끝나고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600명의 사쓰마 번사는 정치세계에서 물러나게 된다.
강화도 사건(1875년) 이토오히로부미(34세)
측량이나 항로 연구를 명목으로 한반도에 군함을 파견해 군사적 위압을 가하는 방안에 대해 태정대신 산조 미나미는 이를 비판했다.그러나 해군 다이스케 가와무라 준요시의 건의에 따라 『운양』, 『제2정묘』 등 2척의 군함이 조선 연안에 극비리에 파견된다.강화도 사건의 발단이 된 운양의 함장은 사쓰마 번 출신 이노우에 요시카루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강화도 사건을 지시했다는 오해가 있는 듯하지만 일련의 흐름을 봐도 어디에도 이토의 글씨가 없다.철도를 만들면서 전함을 지시하겠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토(伊藤)가 이와쿠라(岩倉)와 오쿠보(大久保)의 신용을 얻게 된 것은 메이지 6 년의 정변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순종황제 칙유와 한일병합의 진실 취미 당구에 흥하고 밤에는 축음기를 듣는 생활
1909년에 들어서자 한일 병합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이완용 총리는 일진회 등 친일파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일본 정부와 한국 병합 이야기를 진행하였고 융희 4년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을 조인하였다.
8월 29일 양국 황제의 재가로 조약은 발효되어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 조선총독부의 통치하에 들어갔다.아래에 게재하고 있는 것은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가 한반도를 향해 발한 칙유로 신문에도 게재된 것이다.
한일병합에 대해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칙유나는 방대한 일을 하여 즉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정령에 노력해 왔으나 아직도 길은 험하고 나라는 약화되고 피폐가 도처에 발생해 망연하다. 이 상황을 수습시킬 수는 없다.오히려 대임을 맡기고 완전한 방법과 혁신적인 공적을 얻어야 한다.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결단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우리 국민의 생활과 안전을 확보한다.국민은 국세와 시세를 심찰하고 혼란 없이 대처하며 일본제국 문명의 신정에 복종하고 그 행복을 누리라.나는 결코 국민을 잊은 것이 아니다.국민을 구하고 살리기 위한 진의에서 나온 것이니 이를 잘 이해하라.융희 4년 8월 29일
병합 후 순종(李坧)은 경성부 창덕궁에서 살다가 왕으로 책립되어 이왕으로 칭해졌다.병합 전에는 심신이 쇠약해져 시종에 의지하지 않으면 보행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이 무렵에는 보행이 가능해지면서 쾌활하게 응대하게 되었다.테라우치 마사키는 「국사다난의 심통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고 있다.
이왕은 매우 신경질적이어서 기상 목욕 취침 시간은 스스로 시계를 보고 제시간에 했다.평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취미인 당구에 흥했고 밤에는 축음기를 듣는 생활을 했다.
또 아버지 이태왕이 된 고종만큼이나 기억력이 뛰어나 알현자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제국호텔 초대 주방장을 지낸 요시카와 가네요시 부자의 프랑스 요리를 좋아해 거의 매일 먹고 있었다.
1917년 6월에는 일본을 방문, 10년 전 방한한 다이쇼 천황을 알현하는 형식으로 재회했다.11월에는 창덕궁 대부분이 소손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불에 탄 낙선재라는 건물로 옮겼으나 비좁았다.
이완용은 이태왕이 사는 덕수궁으로 이전하는 것을 생각했으나 이를 들은 이완용은 "천황폐하께서 주신 창덕궁이니 움직이지 않겠다"며 이완용을 질책했고, 이후 2년간 창덕궁 중수가 끝날 때까지 낙선재에서 살았다.
이왕직 사무관 곤도 시로스케는 이왕이 창덕궁의 궁호에 따라 이왕가의 제사가 유지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은 억지로 한일병합을 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순종의 칙유나 이후의 생활이나 언동을 보고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한자 폐지로 닫힌 역사 - 역사를 모르는 역사를 읽을 수 없는 한국교육.
한국에서는 역사를 모르면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없다고 한다.일본에서는 역사는 교과의 하나이며, 자연계 사람 등은 역사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공부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적어도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은 없다.
실제로 한국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역사인식의 차이보다 문제는 그 접근법이다.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 속에서 한반도가 발전한 역사를 왜 배우지 않는가 하는 것은 이상할 따름이다.양면을 배워야 역사지만 한국에서는 통치되고 억압당했다는 얘기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역사학, 토목, 공학, 화학, 의학, 기타 다양한 사회 인프라와 사회제도를 도입한 일본인 는 누구이며 그 인물은 어떤 인물일까.이들은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는데 역사라는 속에서 일절 채용되지 않고 기각된다.그것을 배우지 않고 역사를 배운 것일까.그 시대의 한반도를 직시하고 그 위에서 생각하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접근법이다.
일본의 통치만 외칠 뿐 그 안에서 발전한 사실은 봉인되어 있습니다.둘 다 배우는 것이 역사 교육입니다.
아시아에서 행해진 일본 통치에 대해서는 어떨까.대만통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팔라우, 베트남 등 이들 국가에서의 일본통치하의 식민형태와 비교하면 당시의 일본형 식민지 경영에 대한 생각이 엿보이지만, 아무래도 한국에는 그런 시각이 없는 것 같다.
식민지라고 할 수 있지만, 서양의 식민지 과의 차이는 무엇일까.그것은 언제부터 시작되어, 어떤 프로세스로 아시아에 퍼졌는가.서양이라고 해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들 국가의 식민경영 형태는 다르다.한국이 일본에 대해 들고 나오는 역사 개념은 고정화돼 다각적인 시야를 갖고 있지 않다.어디까지나 일본통치에서 비롯되는 일면적인 역사인식이고, 거기에는 중국조차 들어오지 않으니 동양사도 아니다.혹은 창작사이라고까지 보여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자료는 일본에 보관되어 있다.물론 당시의 일본어로 쓰여져 있다.공문으로 회의록과 결의문 등도 공개돼 있어 일반인도 열람할 수 있다.라고 하면 일본어를 읽을 수 있으면 한국인도 액세스가 가능한 정보가 되고 있다.일제강점기를 알려면 우리 역사학자들은 그곳에 접근해야 하는데 전혀 그런 접근법이 아니다.그러면 그들의 역사적 주장은 도대체 무슨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냐고 물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설마 한국에 한자를 못 읽는 역사학자는 없을까?한국은 1970년부터 한자를 폐지 하고 있어 그 이후 세대는 한자를 읽을 수 없다.한자를 읽지 못하면 일제시대는 고사하고 그 이전의 역사도 읽지 못하게 된다.
한국의 역사인식은 한자의 폐지에도 크게 관여하고 있습니다.한자를 읽을 수 없으면 과거 문서에 접근할 수조차 없습니다.
타국의 세계유산에 일본은 공헌 한국이 일본이 파괴했다고 주장하는 석굴암은 세계유산 등재
이스터 섬의 모아이 상에 대해서입니다만, 일본 미야자키 현에도 모아이 상이 있습니다.일본이 마음대로 모아이상 복제품을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터섬의 모아이상을 복원한 것은 일본 기업 였습니다.
복원을 통해 이스터 섬의 라파뉴이 국립공원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그 답례로 일본에 대해 모아이상의 복각을 허가한 것입니다.
베트남 다낭에 있는 래원교(니혼바시)가 있습니다.1593년에, 일본인 마을에 살고 있던 일본인이 다리를 놓았습니다 .
베트남인들 사이에서는 니혼바시로 사랑받고 있습니다.젊은 베트남 커플이 다리 앞에서 결혼식 기념촬영을 하곤 합니다.이 다리가 있는 호이안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한국의 석굴암이 있습니다.1909년 우체국원이 배달 도중 우연히 발견했습니다.붕괴 직전의 건물을 1915 년부터 일본인이 복구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가 끝난 후 1961년부터 한국이 다시 중수를 했는데, '일본이 대구메에 불상을 늘어놓은'라고 해서 독자적인 배치로 정렬해 버렸습니다.
이후 발견 당시의 사진과 상세한 배치도가 발견되면서 일본의 배치가 옳았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한국은 석굴암은 1000년 넘게 완벽하게 보존돼 왔지만 일본이 질투해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발라 파괴했다며 일본은 질투에 눈이 멀어 석굴암을 훼손한 야만적인 국가라고 했습니다.
석굴암은 1995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일본이 복구를 하기 전까지 석굴암은 방치 상태의 폐허에 불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