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법은 우생사상과 결부된 인종박해-욱일기와 하켄크로이츠를 동일시하는 한국.
2024-01-23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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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기 비판하는 서경덕 교수
한국에서는 서경덕이라는 교수가 욱일기에 대해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와 같다고 주장하면서 사사건건 욱일기와 비슷한 문양을 사용했다는 것만으로 그 제작자에게 메일을 보내 역사인식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의 반일운동을 벌이고 있다.일본에서도 가끔 뉴스에서 거론되지만, 원래 하켄크로이츠는 나치당의 당기이고, 그것을 국기로 만든 경위부터 나치당이 해체되는 바람에 그 깃발이 폐지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위부터 전혀 배경이 다르다.욱일기는 당의 깃발에서도 특정 사상단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일본 문화의 태양신앙 표현의 하나로 풀이된다.
나치와 일본은 같은걸까
한국측 주장으로는 일본의 침략을 받은 욱일기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치 치하에서의 유대인 통치 실태와 한일 병합기의 한반도인 취급 실태를 비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한국은 유대인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하나의 예로 국가에 의한 탄압이라는 의미라면 법적인 제도가 존재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뉘른베르크법을 다룬다.
뉘른베르크법과 우생 사상
뉘른베르크법이란 1935년 나치가 제정한 반유대법이다.내용으로는 독일 거주 유대인은 제국 시민으로 간주되지 않고 '독일인 또는 그 혈족'과의 결혼이나 혼외 교섭(성관계)이 금지되었다.이들은 '인종적 품행'으로 규정돼 발각되면 형사처벌을 받는다.독일민족유전위생보호법은 모든 혼인예정자에 대해 공중위생당국으로부터 혼인적합증명서를 취득하도록 의무화했다.1936년의 올림픽 베를린 대회에서는 독일은 유대인의 출전을 허가하지 않았다.이는 나치의 아리아 지상주의에 입각한 우생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나치 당기의 열쇠십자는 아리아인의 상징으로 묘사된다.즉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이 우생 사상에 의한 인종 박해였고 결과적으로 민족 소멸 작전(제노사이드)으로 향해 갔다.
노비를 개방한 한일 병합
한일합방기는 전혀 다른 한반도인들에게 일본인으로서의 시민권을 부여하고 동일법을 따랐다.참정권도 주어졌고, 교우도 혼인도 자유로웠으며, 같은 공공시설이나 학교를 사용했다.한반도 출신인 손기정은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해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이 출전 대회는 유대인의 참가가 금지된 1936년 베를린 대회이다.일본은 한반도를 청나라 속국의 입장에서 해방시키고 인구의 40%에 이른 노비를 개방하여 평등한 시민으로 만들었다.나치와 일본을 비교한다면 오히려 정반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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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타국의 세계유산에 일본은 공헌 한국이 일본이 파괴했다고 주장하는 석굴암은 세계유산 등재
이스터 섬의 모아이 상에 대해서입니다만, 일본 미야자키 현에도 모아이 상이 있습니다.일본이 마음대로 모아이상 복제품을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터섬의 모아이상을 복원한 것은 일본 기업 였습니다.
복원을 통해 이스터 섬의 라파뉴이 국립공원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그 답례로 일본에 대해 모아이상의 복각을 허가한 것입니다.
베트남 다낭에 있는 래원교(니혼바시)가 있습니다.1593년에, 일본인 마을에 살고 있던 일본인이 다리를 놓았습니다 .
베트남인들 사이에서는 니혼바시로 사랑받고 있습니다.젊은 베트남 커플이 다리 앞에서 결혼식 기념촬영을 하곤 합니다.이 다리가 있는 호이안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한국의 석굴암이 있습니다.1909년 우체국원이 배달 도중 우연히 발견했습니다.붕괴 직전의 건물을 1915 년부터 일본인이 복구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가 끝난 후 1961년부터 한국이 다시 중수를 했는데, '일본이 대구메에 불상을 늘어놓은'라고 해서 독자적인 배치로 정렬해 버렸습니다.
이후 발견 당시의 사진과 상세한 배치도가 발견되면서 일본의 배치가 옳았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한국은 석굴암은 1000년 넘게 완벽하게 보존돼 왔지만 일본이 질투해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발라 파괴했다며 일본은 질투에 눈이 멀어 석굴암을 훼손한 야만적인 국가라고 했습니다.
석굴암은 1995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일본이 복구를 하기 전까지 석굴암은 방치 상태의 폐허에 불과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한일 병합에 반대했던 정치 인생.정한론과 메이지 6년 정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사살되었습니다.이토(伊藤)는 한반도 병합에 대해 시종일관 반대 입장이었습니다.청일전쟁강화조약(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명기하고 청나라에 약속을 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총리직은 1901년 퇴임.한국통감도 1909년 6월 퇴임했고 마지막 직책은 추밀원 의장입니다.의장직이란 명예직이긴 하지만 중립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정치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총리도 아니고 통감도 아닌 의장이 암살된 것입니다 .
암살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명예직이라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는 것 1873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정한론을 저지한 것도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이토(伊藤)는 젊고 32세였습니다.이는 메이지 6년 정변이라고 불리며 천황 폐하의 정한론 폐지 칙명이 내려지게 되어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참의의 절반이 사직하고 군인, 관료 600여 명이 사직하게 됩니다.
여기서 메이지유신의 일등공신이었던 사쓰마번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불분명한 것은 안중근이 무슨 목적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살해라고 해도 안중근이 가지고 있던 권총 브로닝총 탄환은 이토의 체내에서는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몰랐다고 증언했고 자서전에도 분명히 썼다.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 요직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살해가 일본 정부에 미치는 영향이나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1909년 7월 6일 가쓰라 내각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단행할 방침 및 대한시설 대강령'을 각의 결정했습니다.이토 히로부미 암살 전 병합은 결정되었고 , 1901년 이토가 총리대신직을 사임한 것은 한반도의 유화정책을 비판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한반도의 무엇을 바꿨을까요?그는 여순으로 재판을 받았고 암살 이유 진술로 15가지 이유를 열거하고 있습니다.이토와 관련이 있는 항목이나 전혀 관련이 없는 항목도 많이 있습니다.그의 죄명은 살인죄입니다.
안사근이 사용한 브로닝 총은 7발 장전.현장검증에서는 13발의총탄 가 발견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한계 - 병합 당시 모든 것이 부족했던 한반도.
1805년 조선의 유교학자 정동유(鄭東愈)는 한반도에 없었던 것으로 양, 바퀴, 바늘을 꼽았다.바퀴는 나무를 변형하여 가공하는 기술을 의미하고 바늘은 금속의 정밀 가공을 의미한다.당시 한반도에는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어 짐은 소의 등이나 사람이 어깨나 머리 위에 메고 운반하고 있었다.바늘에 대해서도 금속의 끝을 뾰족하게 하고 뒷부분에는 실을 꿰뚫을 구멍을 만들어야 했으며, 이들은 중국에서 들여왔다.
1894년부터 1897년까지 3년간 4차례 한반도를 여행한 이사벨라바드는 서울로 가는 길은 소가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가늘고 미로 같았다며 식별 가능한 정도의 통로일 뿐이라고 썼다.가로 두 바퀴 이상의 차량이 없었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산업혁명은 큰 기계를 제작하고 대량으로 상품을 제조한다.산업기계를 만들려면 나무 가공기술이나 금속 가공기술은 필수다.그리고 제품을 각 지역으로 운반하기 위한 유통이 필요하다. 원자재나 상품을 운반하는 차, 원래 길이 있어야 한다.작업원에게 작업공정을 전달하거나 제조기록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화폐경제가 없으면 제품을 만들어도 거래도 할 수 없다.당시 한반도에는 산업혁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없었다.
일본은 한반도에 산업기계, 자동차, 도로, 학교교육 등을 도입했다.신분제도를 철폐하고 노비를 개방하여 유동적인 노동력을 창출하였다.그로 인해 대량생산, 광역유통, 화폐와 상품을 교환하는 화폐경제가 생겨났다.이것이 일본이 한반도에 가져온 산업혁명과 근대화입니다.
이승만과는 도대체 누구인가 - 일본통치시대를 일절 모르는 반일초대대통령 - 3.1독립운동과도 관련없음.
이승만은 친일 개화파?
독립문은 어디로부터 독립했을 때의 것일까
일제강점기를 모르는 이승만
미국 괴뢰정권으로 출범한 반일정부
일본에서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보면 신기한 점이 많다.조사해 보니 서재필의 독립협회 설립 멤버이기도 했던 것 같다.서재필이라고 하면 청일전쟁 이후 서울 독립문을 만든 중심인물이며,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일으킨 즉 친일 개화파이다.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해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 친분을 쌓았고 상하이에서 민비로 향하던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 독립된 문으로 바뀌었을까.독립문은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가 독립한 것을 기뻐하여 서재필 및 독립협회가 설립한 것이지만 지금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문이라고 한국인들은 완강히 믿고 있다.
1897년 고종의 퇴위 요구 전단 살포를 실시하여 투옥되었으며 1904년 출옥 후 1919년까지 미국에서 살았고, 3.1독립운동에도 관여하지 않았다.3.1운동의 기운을 받아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립했든 파벌항쟁에서 실각한 지 불과 1년 만에 하와이로 이주해 있다.즉 1904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미국에 살면서, 즉 일본 통치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이승만의 전후 한반도 통치는 바로 미국 시각의 통치였다고 볼 수 있다.그것은 한일 병합부터 한반도의 근대화 등에 대해서는 전혀 빈칸으로 되어 있다.그는 러일전쟁조차도 미국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의 정책은 GHQ의 정책과 연결되어 있었고 미국 내에서의 반일 감정과도 완전히 연결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어쨌든이승만 시대에 반일 구조의 토대는 구축되었고 현재에 이른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순종황제 칙유와 한일병합의 진실 취미 당구에 흥하고 밤에는 축음기를 듣는 생활
1909년에 들어서자 한일 병합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이완용 총리는 일진회 등 친일파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일본 정부와 한국 병합 이야기를 진행하였고 융희 4년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을 조인하였다.
8월 29일 양국 황제의 재가로 조약은 발효되어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 조선총독부의 통치하에 들어갔다.아래에 게재하고 있는 것은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가 한반도를 향해 발한 칙유로 신문에도 게재된 것이다.
한일병합에 대해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칙유나는 방대한 일을 하여 즉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정령에 노력해 왔으나 아직도 길은 험하고 나라는 약화되고 피폐가 도처에 발생해 망연하다. 이 상황을 수습시킬 수는 없다.오히려 대임을 맡기고 완전한 방법과 혁신적인 공적을 얻어야 한다.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결단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우리 국민의 생활과 안전을 확보한다.국민은 국세와 시세를 심찰하고 혼란 없이 대처하며 일본제국 문명의 신정에 복종하고 그 행복을 누리라.나는 결코 국민을 잊은 것이 아니다.국민을 구하고 살리기 위한 진의에서 나온 것이니 이를 잘 이해하라.융희 4년 8월 29일
병합 후 순종(李坧)은 경성부 창덕궁에서 살다가 왕으로 책립되어 이왕으로 칭해졌다.병합 전에는 심신이 쇠약해져 시종에 의지하지 않으면 보행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이 무렵에는 보행이 가능해지면서 쾌활하게 응대하게 되었다.테라우치 마사키는 「국사다난의 심통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고 있다.
이왕은 매우 신경질적이어서 기상 목욕 취침 시간은 스스로 시계를 보고 제시간에 했다.평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취미인 당구에 흥했고 밤에는 축음기를 듣는 생활을 했다.
또 아버지 이태왕이 된 고종만큼이나 기억력이 뛰어나 알현자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제국호텔 초대 주방장을 지낸 요시카와 가네요시 부자의 프랑스 요리를 좋아해 거의 매일 먹고 있었다.
1917년 6월에는 일본을 방문, 10년 전 방한한 다이쇼 천황을 알현하는 형식으로 재회했다.11월에는 창덕궁 대부분이 소손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불에 탄 낙선재라는 건물로 옮겼으나 비좁았다.
이완용은 이태왕이 사는 덕수궁으로 이전하는 것을 생각했으나 이를 들은 이완용은 "천황폐하께서 주신 창덕궁이니 움직이지 않겠다"며 이완용을 질책했고, 이후 2년간 창덕궁 중수가 끝날 때까지 낙선재에서 살았다.
이왕직 사무관 곤도 시로스케는 이왕이 창덕궁의 궁호에 따라 이왕가의 제사가 유지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은 억지로 한일병합을 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순종의 칙유나 이후의 생활이나 언동을 보고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