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을 지탱한 일본 중국 건국은 일본 유학 중이던 쑨원이 달성한 것
2021-06-07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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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은 청일전쟁이 끝난 뒤 광저우에서 무장봉기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1897년 미야자키 도도텐의 소개로 두야마 미쓰루와 만났고, 두산을 통해 히라오카 코타로로부터 도쿄에서의 활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았다.또 주거지인 와세다의 2천㎡ 저택은 이누요타케시가 주선했다.1902년에 일본인 오쓰키 카오루(大月薫)와 결혼했다.
오랫동안 만주민족의 식민지로 여겨졌던 한민족의 손문은 독립하고 싶다, 辮발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같은 해 미야자키 도도텐 등의 원조로 중국 동맹회를 결성. 여기서 도쿄에 유학중인 장제스와 만난다.
아울러 읽고 싶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1911년 10월 10일 공진회와 동 학회의 지도하에 무장봉기가 일어나 각 성이 이에 호응하여 독립을 호소하는 신해혁명으로 발전하였다.
현재도 베이징 상하이 우한 난징 다롄 홍콩 등에 쑨원의 일본 이름인 중산을 딴 중산공원이 있다.길 이름에도 중산로라는 것도 많아 손문이 일본인 아내를 둔 것은 중국인은 누구나 알고 있다.사실 나는 중국에 갔을 때 처음 중국인에게 들었어.
미야자키 유텐은 김옥균과도 교류가 있어 일본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를 심화시켰다.김옥균의 암살로 한반도는 자력 근대화의 길을 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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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 수수께끼 - 안중근의 배후에 누가 있었나?발견되지 않은 블로닝 총의 총탄.
암살 전 한일병합은 각의결정
7발 장전된 총에서 13발이 발사?
기병총 탄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러시아는 이토의 방문을 환영
러일의 혼란은 로마노프의 실수?
사라예보 사건에서도 사용된 총
공통점은 2점밖에 없다
이토의 얼굴을 몰랐던 안중근
이토의 눈앞까지 홀로 다가온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한일 병합을 앞당겼다는 얘기를 듣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이유는 1901년에 이토는 러시아 이권의 남하를 책임지고 총리대신직을 사임한 바 있다.가쓰라 내각에서 한일병합에 대한 방침을 밝힌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 단행 방침 및 대한시설 대강령'의 각의 결정은 암살 전인 7월로 되어 있다.이에 따라 7월 이토(伊藤)는 한국통감을 은퇴했다.이토(伊藤)의 암살은 같은 해 10월 26일이다.
안중근의 브로닝 총탄은 이토의 체내에서 발견되지 않았다.사건으로 인해 발포된 총탄은 13발.피탄자는 다음과 같다.
이토 히로부미 3발, 무로다 요시후미 5발, 나카무라 고레코 2발, 모리 타이지로 1발, 카와카미토시히코 1발, 다나카 신지로 1발.
브로닝 총은 7발 장전된 총이다.이토(伊藤)의 체내에서는 프랑스제 기병총 2탄이 발견되어 1발은 관통하고 있었다.안중근이 이토를 잘못 쳤을 때 작전을 보완하기 위해 하얼핑역 지붕, 2층 부분 등에서 저격하고 있다.왜 2층 부분이냐면 사법해부에 의한 탄도를 봐도 오른쪽 어깨에서 배꼽을 향해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안중근에 의한 충동적 단독범이 아니라면 주모자는 누구냐는 얘기다.
일본 내부의 정치항쟁이 원인이라는 설은 서두의 이유에서 있을 수 없다.일본 내에서는 정치적 매듭도 절차도 이미 붙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토의 방문을 환영한다.
러시아설은 러시아의 이점으로 볼 때 생각하기 어렵다.이토(伊藤)의 목적은 러시아의 복권을 돕기 위한 무역협정을 맺는 것이었다고 한다.꼬꼬꼬댁을 만나러 하얼핀에 갔고 꼬꼬댁도 대환영했다.
애초 러일개전을 목적으로 한다면 정치적 실권이 없는 이토를 암살하는 것은 빗나간 일이다.그리고 러일전쟁이 끝난 지 불과 4년 만에 다시 개전 등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얘기다.
레닌설이라는 게 있어.논거는 다음과 같다.레닌은 로마노프의 추문을 긁어 모으고 있었다.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는 레닌에게 큰 계기가 됐다.로마노프 왕조의 대실수로 러시아 국내에 대량의 전단을 살포하고 있다.
제1차 대전의 계기가 된 오스트리아 대공 암살(사라예보 사건)에도 브로닝 총이 사용됐다.브로닝 총은 러시아 육군이 채용하는 총이다.그리고 레닌은 브로닝총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
이 설에서의 공통점은 브로닝총과 로마노프의 범행으로 가장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코민테른의 전략은 스스로 싸우지 않고 사회를 선동하는 것이 상투수단이기도 하다.다른 나라끼리 전쟁을 시키는 것도 포함된다.
러일전쟁 종결이 1905년, 이토 암살이 1909년, 사라예보 사건이 1914년이다.그리고 러시아 혁명은 1917년.제1차 세계대전 중 혁명을 완수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대해 주모자는 수수께끼 속이다.다른 각도에서 보면 현장에 남은 것은 안중근과 브로닝총뿐이었다.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모른다. 진술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자서전에도 분명히 그 자신이 쓰고 있다.암살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그 장소에는 이토 이외에도 동행한 일본인도 여럿 있었고 러시아인도 있었다.애초부터 기병총을 든 저격수들은 준비를 했고 예정대로 사격을 했다 .
안중근이 이토의 눈앞까지 갈 필요성은 있었을까.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안중근에게 주변의 주의를 끌고 멀리서 저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현장에는 안중근과 브로닝 총만 남게 된다.
좁은 문이었던 조선인의 일본군 입대.전쟁의 목적을 잘 알고 있던 입대 지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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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지원자입소자선발률지원 배율1938년2,946명406명16.2%7.3배1939년12,348명613명4.9%20.2배1940년84,443명3,060명3.6%27.6배1941년144,743명3,208명2.2%45.1배1942년254,273명4,077명1.6%62.4배1943년303,394명6,000명1.9%50.6배
상기는 한반도에서의 일본군 모집병에 대한 한반도인의 응모 인원과 채용 인원입니다. 입대 시험에는 일본어 실력이나 이해력,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 전쟁의 목적이나 세계 정세 등 다양한 항목이 테스트되어 1942년에는 경쟁률 62.4 대 1이 되었고 합격한 사람은 불과 1.6%였습니다.
모집에 참여한 조선인 지원병은 일본군으로서 싸우는 것은 한반도를 지키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전쟁에서는 일본인이 최전방에서 싸우고 한반도인은 후방지원이라는 형태로 군수관련 공장에서 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원하지 않으면 전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에서 징병이 시작된 것은 종전 전인 1944년부터입니다. 한반도인 군인의 사망자율은 9.2%, 일본군 전체의 사망자율은 해군이 24.22%, 육군은 19.76%입니다.
입대한 한반도 병사들은 언어는 물론 이 전쟁의 목적이 아시아 개방을 위한 전쟁이라는 점과 역사적 배경 등을 충분히 이해한 후 자원했다. 아시아 방위는 한반도 방위와 동의한다. 그들은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지원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일본군에 입대한 젊은이들은 친일의 배신자라고 합니다. 군인의 명예에 진흙을 계속 칠하는 행위는 비열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한반도에 뿌리내린 노비 제도일제 치하에 처음으로 신분 제도가 철폐되었다 노비제도는 농경문화와 관련이 깊다.중국에서는 진린산맥, 화이강을 잇는 선의 남쪽이 연간 강우량이 1000mm 이상. 북쪽이 1000mm 미만이고 남쪽이 벼농사 문화, 북쪽이 밭농사 문화이다.
밭농사는 단순히 효율성이 나빠 노비 수요가 많았다. 그래서 북쪽에서는 노비를 많이 사용하였다.범죄를 저지른 인간을 노비로 만들거나 빚 대신 노비로 바꿔 양산했다.
일본은 중국 남부에서 벼농사가 전래되었기 때문에 벼농사 문화가 되었고, 한반도에는 중국 북부에서 밭농사가 전해졌다.밭농사의 노동력으로 노비는 재산으로 매매되었다.
노비 5명에게 소 1마리로 매매되었다.남조선반도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졌으나 직파 재배로 모내기를 하게 된 것은 이씨 조선 말기부터이다.
15~17세기에는 조선 시대 인구의 30~40%가 노비였다.1609년 울산 호적 자료에 따르면 47%가 노비였다.1606년 경상남도 산청은 64%가 노비였다. 노비의 규모는 한국 지역에서는 50% 규모 였다.
국제적으로 인종차별을 철폐하려는 시도는 1919년 일본 대표단이 국제연맹 파리회의에서 한 제안이 처음이다.
이는 미국의 맹반발로 가결되지 않았다.국제적 인종차별 철폐는 1969년 발행된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조약이 처음이다.
일본의 노비 제도는 율령제 붕괴를 거쳐 10세기 초 헤이안 시대 중기에 노비 폐지령 가 내려졌다.그러나 현실적으로 인신매매는 근절되지 않았고 에도 막부는 1612년, 1619년, 1683년에 자주 금지령을 내려 엄단했다.
중국에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애신각라의에 의해 법적으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미국의 노예해방선언은 1863년 발포됐지만 합중국으로서 인종차별을 불법으로 규정한 것은 1964년 짐 크로우법의 철폐를 기다리는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비, 백정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실상은 변하지 않았다.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형 근대화를 목표로 상하이에서 암살된 김옥균은 조선 사회의 봉건적 신분제도야말로 불평등의 근원이며 국가 부패, 쇠퇴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한일병합과 호적제도의 도입으로 호적에 신분기재를 폐지하였다.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성을 기다리지 않는 노비에게 성을 주었다.이로써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신분 해방에 반발하는 양반들은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으나 신분을 불문하고 교육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일본 정부에 의해 즉각 진압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인종차별 철폐를 호소한 곳은 일본이었습니다.그리고 노예제도는 10세기초에 없어졌습니다.
원망한 것은 양반 노비에서 해방된 한반도인들은 자유를 구가했다 평범하게 생각하고 일본을 원망한 것은 양반이죠.인구의 절반이나 되는 노비를 풀어준 일본을 노비가 원망할까요? 양반들은 원망하죠.어느 날 갑자기 같은 신분이 되었다니까.
노비가 말했습니다.나는 평생 노비의 삶을 원했는데 개방해!일본이 미워!!
종전 후 양반이 정치에 복귀하고 나서 계속 이 상태인 거죠.조선시대 미화와 일제시대 부정이죠.
국민들이 일본을 좋게 말하면 용서할 수 없죠.
환상의 영웅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 병합을 했다는 거짓 교육.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 병합을 한 인물?
중대한 착오를 범했다고 발언한 안중근
이미 화해한 유족과 용서하지 않는 세력
알려지고 싶지 않은 진실 조작시킨 거짓말
진실은 어둠에 묻힌 채
한국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정한론자였다고 완강히 믿고 있습니다.그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저는 이토가 한국통감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토가 한일 병합론자였다고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시종 한일 병합에는 반대 입장이었습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얼굴도 모른 채 암살을 저지릅니다.이토(伊藤)는 더 이상 총리대신도 총감도 아닙니다.그리고 안중근은 옥중에서 자신이 중대한 착오를 저질렀다고 발언합니다.
1939년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박문사에서 이토의 공양을 올리고 조선호텔에서 이토의 아들 이토 후미요시를 면회하여 사과를 하고 화해하였다.이를 용서하지 못한 김구는 장제스에게 상하이에 살던 안준생에게 조작 혐의를 씌워 처형해 달라고 부탁한다.이것은 즉, 어떻게 된 것일까.
안중근은 영웅이어야 한다.반일 독립파 영웅으로 이용돼야 한다.이것이 독립을 지향하는 세력의 희망이었다.즉 이토 히로부미는 정한론자여야 한다는 얘기다.한국인들이 오해해서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 병합을 추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렇게 조작된 것이다.
이토가 병합에는 반대였다는 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조차 몰랐다는 점, 암살은 중대한 착오였다고 안중근이 말한 점, 유족들이 이미 화해한 사실 등은 국내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
안중근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영원히 정한론자인 것이다.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