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은 일본인이 만든 메이지 마을입니다.메이지좌(明治座)에서는 많은 조선어 영화와 오락이 공개되었다.
2021-12-20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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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동은 일본인이 만든
명동은 한국의 대표적인 번화가이자 관광지인데, 원래는 일제강점기에 메이지초 로 개발된 마을이다.이 일대는 일본인 거주자가 많아 한반도의 긴자로 불리며, 1930년대에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경성점을 비롯해 5개의 백화점이 모이는 격전구가 되어 반도에서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다.경성부에는 메이지좌(明治座)가 개업하여 많은 영화와 연극이 개봉되었다.
MEMO 한반도사람들은일제하에서근대화를보고문화적인생활을하게되었습니다.
많은 영화가 개봉한 메이지좌
1937년 4월 24일에는 성봉영화각과 신흥키네마가 합작하고 이규환(조선어판)과 스즈키 시게요시가 공동 감독한 조선어 최초의 토키 나그네(조선어판)(일본 개봉제 여로)가 동관에서 개봉되었다.
동관에서는 일본어판의 상영이었지만, 같은 날, 부내의 우미관에서는 조선어판이 공개되고 있다.조선의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의 개봉관 역할도 해 1940년 8월 6일에는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등록금(조선어판)(감독 최인규), 1941년 2월 19일에는 동아영화사가 제작한 영화 지원병(감독 안유영)이 이 관에서 개봉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발전시킨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일제강점기에 의한 근대화는 한반도 사람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음이 분명하다.초가집에 살며 오솔길을 오가던 동네가 자국 감독이 작성한 조선어 영화를 즐기는 생활로 바뀐 것이다.한국은 일본에 수탈되어 노예화되었다고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아울러 읽고 싶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POINT 한반도에서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계급사회였고, 조선 후기에는 노비의 비율이 지역에 따라 절반에 달했습니다.신분제를 폐지하고 노비를 풀어준 것은 일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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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김옥균과 미야자키 도도천일전쟁 전에 일본에서는 청나라에 대한 분노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손문이나 김옥균과도 교류가 있어 신해혁명을 뒷받침한 미야자키 도도텐의 저서 『33년의 꿈』에는 김옥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김옥균 참살 소식은 일본 전역을 크게 놀라게 했다.
문제는 청·조선 양국의 김옥균 암살이 일본 전역에 예상을 뛰어넘는 분노의 폭풍을 일으켰다는 점이다.그래서 때마침 조선 전라도에 발생한 동학당의 난이 확산된 것과 맞물려 이를 큰 트리거로 한 청일 개전 시계가 급격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아사쿠사 혼간지에서의 김옥균 본상이 메이지 27년의 5월 20일, 청일전쟁의 화투가 끊어진 것이 8월 1일. 그 사이, 불과 2개월 조금, 「쏘아라 응징이나 청국」의 대합창은 순식간에 청일 양국 개전으로 치닫고 만 것이다.
김옥균은 일본형 문명 개화를 목표로 한 조선인으로 갑신사변으로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민비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입니다.
쿠데타는 좌절되어 삼일천하라고 불렸고, 그 후 일본으로 망명합니다.거기서 이누요타케시나 미야자키 도도텐, 후쿠자와 유키치등의 지원을 받아 친교를 돈독히 합니다.그러나 김옥균은 민비에 준 옛 친구에게 속아 상하이로 향했고, 그곳에서 암살당합니다.
사진은 당시 신문 기사에서 일본인이 본 것입니다.김옥균은 자신의 혁명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죽은 모습이 일본인들을 움직이며 한반도를 독립으로 이끌었다.
청일전쟁의 원인은 동학당의 난이라고 하는데, 그 전에 김옥균의 암살로 인해 일본 국민들의 청나라에 대한 적의는 충만했음을 미야자키 도도천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일병합기에 한반도는 근대화되어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한국 정부의 모순된 데이터
이는 한국 통계청이 공개하고 있는 한일 병합기 한반도의 실태입니다.
의사 수: 약 7배 증가
감염병 사망자 수: 우위로 감소
수도 공급량: 약 4.8배 증가
유치원 수: 10년 만에 약 2배 증가
아동보호사업: 약 4.3배 증가
공립 초등학교 수: 약 7.5배 증가
인구: 약 1.8배 증가
강도 수가 우위로 감소했다.
일본통치시대에 한반도는 크게 경제성장을 하여 근대화의 길을 달려가던 시대였습니다.
한국은 일본에 병합되어 노예화되고 학살당했다고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지만 인구는 증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일 병합기는 약 35년입니다.이 기간에 1.8배로 인구가 증가한 원인으로는 치안 유지나 의료 정비나 빈곤 감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치안은 법률, 경찰, 교육의 보급에 의해서 유지되고, 의료는 의료 종사자의 인적 보충과 약이나 의료 기기등의 물자면의 충실에 의해 실현됩니다.
빈곤 감소는 많은 직업 창출로 인한 고용 증가와 식량 사정 개선이 필요합니다.일본은 이러한 모든 면에서의 사회 정비를 실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구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이 데이터는 한국 정부 자신이 공개하고 있는 데이터임에도 전혀 모순된 주장을 국가 전체적으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타국의 세계유산에 일본은 공헌 한국이 일본이 파괴했다고 주장하는 석굴암은 세계유산 등재
이스터 섬의 모아이 상에 대해서입니다만, 일본 미야자키 현에도 모아이 상이 있습니다.일본이 마음대로 모아이상 복제품을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터섬의 모아이상을 복원한 것은 일본 기업 였습니다.
복원을 통해 이스터 섬의 라파뉴이 국립공원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그 답례로 일본에 대해 모아이상의 복각을 허가한 것입니다.
베트남 다낭에 있는 래원교(니혼바시)가 있습니다.1593년에, 일본인 마을에 살고 있던 일본인이 다리를 놓았습니다 .
베트남인들 사이에서는 니혼바시로 사랑받고 있습니다.젊은 베트남 커플이 다리 앞에서 결혼식 기념촬영을 하곤 합니다.이 다리가 있는 호이안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한국의 석굴암이 있습니다.1909년 우체국원이 배달 도중 우연히 발견했습니다.붕괴 직전의 건물을 1915 년부터 일본인이 복구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가 끝난 후 1961년부터 한국이 다시 중수를 했는데, '일본이 대구메에 불상을 늘어놓은'라고 해서 독자적인 배치로 정렬해 버렸습니다.
이후 발견 당시의 사진과 상세한 배치도가 발견되면서 일본의 배치가 옳았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한국은 석굴암은 1000년 넘게 완벽하게 보존돼 왔지만 일본이 질투해 시멘트와 콘크리트를 발라 파괴했다며 일본은 질투에 눈이 멀어 석굴암을 훼손한 야만적인 국가라고 했습니다.
석굴암은 1995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일본이 복구를 하기 전까지 석굴암은 방치 상태의 폐허에 불과했습니다.
순종황제 칙유와 한일병합의 진실 취미 당구에 흥하고 밤에는 축음기를 듣는 생활
1909년에 들어서자 한일 병합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이완용 총리는 일진회 등 친일파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일본 정부와 한국 병합 이야기를 진행하였고 융희 4년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을 조인하였다.
8월 29일 양국 황제의 재가로 조약은 발효되어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본 조선총독부의 통치하에 들어갔다.아래에 게재하고 있는 것은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가 한반도를 향해 발한 칙유로 신문에도 게재된 것이다.
한일병합에 대해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칙유나는 방대한 일을 하여 즉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정령에 노력해 왔으나 아직도 길은 험하고 나라는 약화되고 피폐가 도처에 발생해 망연하다. 이 상황을 수습시킬 수는 없다.오히려 대임을 맡기고 완전한 방법과 혁신적인 공적을 얻어야 한다.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결단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우리 국민의 생활과 안전을 확보한다.국민은 국세와 시세를 심찰하고 혼란 없이 대처하며 일본제국 문명의 신정에 복종하고 그 행복을 누리라.나는 결코 국민을 잊은 것이 아니다.국민을 구하고 살리기 위한 진의에서 나온 것이니 이를 잘 이해하라.융희 4년 8월 29일
병합 후 순종(李坧)은 경성부 창덕궁에서 살다가 왕으로 책립되어 이왕으로 칭해졌다.병합 전에는 심신이 쇠약해져 시종에 의지하지 않으면 보행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이 무렵에는 보행이 가능해지면서 쾌활하게 응대하게 되었다.테라우치 마사키는 「국사다난의 심통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고 있다.
이왕은 매우 신경질적이어서 기상 목욕 취침 시간은 스스로 시계를 보고 제시간에 했다.평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취미인 당구에 흥했고 밤에는 축음기를 듣는 생활을 했다.
또 아버지 이태왕이 된 고종만큼이나 기억력이 뛰어나 알현자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제국호텔 초대 주방장을 지낸 요시카와 가네요시 부자의 프랑스 요리를 좋아해 거의 매일 먹고 있었다.
1917년 6월에는 일본을 방문, 10년 전 방한한 다이쇼 천황을 알현하는 형식으로 재회했다.11월에는 창덕궁 대부분이 소손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불에 탄 낙선재라는 건물로 옮겼으나 비좁았다.
이완용은 이태왕이 사는 덕수궁으로 이전하는 것을 생각했으나 이를 들은 이완용은 "천황폐하께서 주신 창덕궁이니 움직이지 않겠다"며 이완용을 질책했고, 이후 2년간 창덕궁 중수가 끝날 때까지 낙선재에서 살았다.
이왕직 사무관 곤도 시로스케는 이왕이 창덕궁의 궁호에 따라 이왕가의 제사가 유지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은 억지로 한일병합을 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순종의 칙유나 이후의 생활이나 언동을 보고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파리국제회의장서 제출된 인종차별철폐법안 세계최초 일본 제안 1919년 일본은 파리에서 세계 최초로 국제회의장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제안했다.참가국들은 깜짝 놀랐다.그런 발상이 없었기 때문이다.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국제적 위상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1920년 발족하는 국제연맹에서는 상임이사국이 된다.
그 전 단계 회의장에서 무슨 말을 꺼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일본의 설득에 의해, 앞으로 한 걸음에 가결이라고 할 때에 미국의 맹반발을 받아, 가결에는 이르지 못했다.미국은 노예제도보다 우위에 있는 경제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은 아시아 각국의 식민지 현황을 우려해 그 비판을 통해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다.대동아공영권 구상이란 무엇인가.그것은 아시아 개방과 백인 지배의 배척이었다.
일본은 쑨원의 중화민국 건국을 돕고 김옥균을 지원했다.김옥균의 삼화주의는 일본 조선 중국이 불가침의 독립을 유지하고 국력을 높여 백인 지배와 맞선다는 생각이다.
그 밖에도 아시아 각국에서 일본으로 유학 온 장래의 지도자들이 있었다.일본은 아낌없이 근대화의 혜택을 전했다.청일전쟁에서의 한반도 독립도 마찬가지다.이토 히로부미는 한국통감 퇴임 때까지 한반도 독립론이었고 병합 전년까지 유지되었다.
한반도 이외의 아시아 국가들은 이러한 것들을 잘 알고 있다.그래서 현재까지도 친일이다.대만에서 종군한 사람들은 지금도 아시아 개방 싸움에 참가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어떤 전쟁도 옳은 것은 아니지만 싸우는 데는 이유가 있다.패배하더라도 그 이유야말로 중요하다.미일의 시각에서는 정반대일 것이고 한국의 시각도 다를 것이다.아시아 시점에서 보면 많은 것들이 보인다.
두 번째는 1943년 대동아회의 기념사진
일본 : 도조 히데키
중화민국: 왕조밍
만주국: 장경혜
필리핀 공화국: 호세 라우렐
버마 국가: 바 모우
태국 왕국 : 원 와이타야콘
인도: 찬드라 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