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건국과 국호 변경의 의미를 모르는 한국
2021-07-03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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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중국 황제를 유일한 황제로 삼고 한반도는 왕이며 일본도 왕이라는 이들의 주장은 우스운 얘기다.일본은 원래 중국의 속국이 아니다.한반도는 역사상 중국의 속국으로 황제에 대한 왕의 입장이었을지도 모른다.청일전쟁 이후 한반도가 독립을 하고 고송이 더 이상 중국의 속국이 아니니 대등한 의미인 황제 칭호를 갖고 새롭게 대한제국을 세웠다.
아울러 읽고 싶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일본은 이를 승인했다.그리고 한일병합에 이르는 천황폐하의 칙서에서도 한국황제폐하라고 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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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한일 병합에 반대했던 정치 인생.정한론과 메이지 6년 정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사살되었습니다.이토(伊藤)는 한반도 병합에 대해 시종일관 반대 입장이었습니다.청일전쟁강화조약(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명기하고 청나라에 약속을 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총리직은 1901년 퇴임.한국통감도 1909년 6월 퇴임했고 마지막 직책은 추밀원 의장입니다.의장직이란 명예직이긴 하지만 중립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정치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총리도 아니고 통감도 아닌 의장이 암살된 것입니다 .
암살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명예직이라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는 것 1873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정한론을 저지한 것도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이토(伊藤)는 젊고 32세였습니다.이는 메이지 6년 정변이라고 불리며 천황 폐하의 정한론 폐지 칙명이 내려지게 되어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참의의 절반이 사직하고 군인, 관료 600여 명이 사직하게 됩니다.
여기서 메이지유신의 일등공신이었던 사쓰마번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불분명한 것은 안중근이 무슨 목적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살해라고 해도 안중근이 가지고 있던 권총 브로닝총 탄환은 이토의 체내에서는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몰랐다고 증언했고 자서전에도 분명히 썼다.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 요직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살해가 일본 정부에 미치는 영향이나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1909년 7월 6일 가쓰라 내각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단행할 방침 및 대한시설 대강령'을 각의 결정했습니다.이토 히로부미 암살 전 병합은 결정되었고 , 1901년 이토가 총리대신직을 사임한 것은 한반도의 유화정책을 비판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한반도의 무엇을 바꿨을까요?그는 여순으로 재판을 받았고 암살 이유 진술로 15가지 이유를 열거하고 있습니다.이토와 관련이 있는 항목이나 전혀 관련이 없는 항목도 많이 있습니다.그의 죄명은 살인죄입니다.
안사근이 사용한 브로닝 총은 7발 장전.현장검증에서는 13발의총탄 가 발견되었습니다.
창씨개명 강요받았다는 새빨간 거짓말 - 일본명 탐낸 한반도
호적제도와 신분제도의 폐지
조선의 호적
조선 풍습을 배려한 제도
학교 교육제도의 보급
당시 국무대신 오쿠노 세이료의 발언
만주로 퍼지는 조선족
오족협화를 노래한 만주국
일제 강점기에 호적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씨조선시대에는 성을 가지지 않고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는 천민에게도 성을 붙여 신분기재를 불필요하게 등록하였다. 이에 따라 신분제도는 폐지된다.한반도 호적의 기재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에서 채용된 호적
본적
전호주
호주와의 속병
아버지의 성명
어머니의 성명
호주의 속병
호주의 본관
호주의 성명
호주의 생년월일
모-기재사항은 호주에 같음은 호주에 같음
아내-기재사항은 호주와 같음
자손 등의 친족-기재사항은 호주와 같다.
동 배우자 - 기재사항은 호적주와 같음
7.의 본관은 한반도 특유의 씨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이걸 유지했어.일본 본국의 호적에는 7개 항목이 없다.동성불혼 원칙은 한반도 특유의 제도로 이를 유지했다.사위 양자 제도는 일본을 본떠 도입되었다.여성 호적주가 인정될 수 있도록 변경하였다.창씨개명이란 무엇인가 하면 한반도는 유교를 신봉했기 때문에 부부별성이다.이것을 일본식 가족을 나타내는 씨를 창설하려는 시도이며, 신청제 였다.게재한 화상에는 그 사실이 설명되어 있다.조선 이름을 빼앗는 것도 아니고 성이 없는 사람에게 성을 주고 신분 기재를 폐지했다.그리고 애초에 강제는 아니다.
신분제를 폐지함으로써 신분 격차 없이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게 됐다.학교 교육 제도의 도입은 모든 어린이에게 교육 환경을 정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1911년 6.3%인 초등교육 여자 취학률이 1941년에는 33.1%로 증가 하였다.
자민당 총무회에서 노나카 히로무가 아소 발언(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요구했다고 한 발언)을 비판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오쿠노 세이료가 「노나카군, 자네는 젊으니까 모를지 모르지만, 아소군이 말하는 것은 100% 정답이야.조선 이름 그대로라면 장사하기 어려웠다.그러한 호소가 많았기 때문에, 창씨 개명을 단행했다.도장을 찍은 사람은 내무관료, 이 나야 "라고 발언했다.
지금도 당시 만주 지역에는 많은 조선족이 살고 있지만 조선 북부는 농업에 적합하지 않아 홍수와 가뭄을 거듭하고 있었다.일본의 영향이 확대되면서 농지를 찾아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것이다.조선인이라고 하면 만주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 이름을 원했다.일본인이라면 큰 얼굴이 생긴다 는 것이다.
만주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애신각라의를 황제로 한 일본의 괴뢰국가이다.당시에는 많은 일본인들도 이주했다.만주국의 건국 이념은 일본인·한인·조선인·만주인·몽고인의 오족협화 로 되어 있다.즉 이 지역에는 크게 이들 오족이 공존하여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망한 것은 양반 노비에서 해방된 한반도인들은 자유를 구가했다 평범하게 생각하고 일본을 원망한 것은 양반이죠.인구의 절반이나 되는 노비를 풀어준 일본을 노비가 원망할까요? 양반들은 원망하죠.어느 날 갑자기 같은 신분이 되었다니까.
노비가 말했습니다.나는 평생 노비의 삶을 원했는데 개방해!일본이 미워!!
종전 후 양반이 정치에 복귀하고 나서 계속 이 상태인 거죠.조선시대 미화와 일제시대 부정이죠.
국민들이 일본을 좋게 말하면 용서할 수 없죠.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 안중근은 이토(伊藤)의 얼굴을 몰랐다는 것은 그 자신의 자서전을 보면 분명합니다.1909년 10월 26일 그 시간에 얼굴도 모르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핀 역을 방문한다는 것을 왜 알고 있었을까요?
안중근자전 마지막 페이지--
먼저 얼굴이 노랗고 수염이 있는 노인에게 발포했다.
나는 이토(伊藤)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착각했다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당황하면서 가장 위엄 있는 인물을 향해 발포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병합 반대파이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저지한 메이지 6년 정변 이토 히로부미 탄생 (1841년)
메이지 6년 정변(1873년) 이토오히로부미(32세)
정원구성원(국가의사결정기관)
정한론파 사이고오타카모리 에토오신히라이타가키테이스케 고토오쇼오지로 후지마타네오미
비정론파 산죠오미 이와쿠라구시 키도타카노스케 오오쿠보토시미치 오쿠마시게노부 오키타쿠토
당연하지만, 이토(伊藤)는 아직 젊고 정원의 멤버가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70년부터 발족한 「공부성」의 설치에 진력.공부성은 1871년 철도 조선 광산 제철 전신 등대 제작 공학 권공 토목 등 10개 기숙사와 측량 1개 업체로 편성됐다.
산조 미타마사 대신이 병에 걸렸을 때 정한론에 반대했던 이토의 이와쿠라를 의장으로 하는 아이디어로 정한론은 실패로 끝나고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600명의 사쓰마 번사는 정치세계에서 물러나게 된다.
강화도 사건(1875년) 이토오히로부미(34세)
측량이나 항로 연구를 명목으로 한반도에 군함을 파견해 군사적 위압을 가하는 방안에 대해 태정대신 산조 미나미는 이를 비판했다.그러나 해군 다이스케 가와무라 준요시의 건의에 따라 『운양』, 『제2정묘』 등 2척의 군함이 조선 연안에 극비리에 파견된다.강화도 사건의 발단이 된 운양의 함장은 사쓰마 번 출신 이노우에 요시카루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강화도 사건을 지시했다는 오해가 있는 듯하지만 일련의 흐름을 봐도 어디에도 이토의 글씨가 없다.철도를 만들면서 전함을 지시하겠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토(伊藤)가 이와쿠라(岩倉)와 오쿠보(大久保)의 신용을 얻게 된 것은 메이지 6 년의 정변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