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탄핵은 음모인가?집단이 만들어낸 히스테리한 정권교체극.헌법재판소도 절차를 무시.
2021-12-08
카테고리:위안부문제
랭킹 참여 중이에요클릭 응원 부탁드립니다.
박근혜탄핵은 조금 옛날 이야기로 일본에서는 느끼지만 한국에서는 현재진행형 상태다.당시 새누리당에서 분리된 우리공화당은 지금도 박근혜 탄핵 무효와 최순실 게이트 사건의 누명을 호소하고 있다.애초 그 탄핵사건은 세월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학여행생을 태운 채 가라앉은 세월호
수학여행 고교생이 타는 여객선이 진도 앞바다에서 전복돼 침몰한 사건이다.사망자는 180명에 이른다.이 사건 때 정부의 대응에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해경은 많은 배를 세월호 주변에서 에워싸고 있을 뿐 선내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침몰했다.
일본 해상보안청은 구조 협조를 통보했으나 한국 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있다.
MEMO 일본으로부터의 지원을 거절한 이유도 위안부문제등으로 옥신각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불명한 상태입니다.
공백의 7시간은 아직도 불분명한 채
어쨌든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그 사건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성형수술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하면서 여론은 과열됐다.보도의 진위는 전혀 모른 채 정권 비판에 국민은 열중했다.
어쨌든 사건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7시간 동정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탄핵을 결정지은 최순실 게이트 사건
다음으로 최순실 게이트 사건이 일어나는데 최순실은 박근혜가 젊었을 때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점쟁이라고 하는데 그 인물에게 대통령 정보가 누설됐다거나 최순실이 대통령에게 조언을 해 국정에 관여했다거나 공모해 뇌물수수 행위를 했다는 의혹이다.
그 때에도 박근혜는 롯데호텔에서 복수의 남성과 발칙하게 파티를 하고 있었다는 등의 기사가 주간지에 실렸다고 한다. 많은 의혹이 의혹대로 탄핵소추까지 치닫는다.
MEMO 주간지 기사에 한국 국민은 열광했습니다.기사의 내용은 너무 삼류기사같은 내용이지만 국민들은 믿었습니다.
주간지 기사에 의한 탄핵 결의 한국에서는 2/3 국회의원에 의한 탄핵 결의가 헌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박근혜인 새누리당에서도 조반이 일어나 주간지 보도대로 탄핵 결의가 이루어졌다고 탄핵 크라이시스의 저자이자 탄핵 재판의 박근혜 대리 변호인이었던 채명성 씨는 말한다.
헌법재판소도 탄핵을 향해서 절차를 일탈 탄핵요건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국회결의 외 헌법재판소에서의 위법성 심의를 거쳐 탄핵 상당의 판결을 얻을 필요가 있는데, 이 책에서는 재판상의 절차를 대부분 무시당하고 탄핵심의는 진행되었다 라고 하고 있다.
국회의원도 헌법재판소도 국민의 열기 속에 탄핵을 향한 목적지까지 달려갔다.실제로 박근혜 탄핵과 관련된 사실관계 여부를 떠나 팩트체크에 대해 국민도, 국회도, 헌법재판소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탄핵이 이뤄져 징역 25년을 선고받았다.(2021년 재심에 의해 징역 20년)
POINT 한국에는 국민정서법이 있다고 야유받지만 박근혜탄핵사건은 그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랭킹 참여 중이에요클릭 응원 부탁드립니다.
[관련 기사]
인권 무관심의 문재인 일본 통치를 인권 침해로 규정한 반일 활동 지도자인 자칭 인권 변호사 문재인은 위안부문제, 모집공 문제는 세계에 보편적 인권의 문제라면서 열심이다.하지만 그 외의 인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2015년 이후 수백 명의 태국인 노동자가 사망했다.이유는 사고, 자살, 건강 문제, 40%가 불분명하다.상당수는 불법 노동자이지만 모집공 문제와는 다른 문제인 것 같다.성산업 브로커의 거점국으로 지목되면서 많은 한국 여성들이 속아 국외에서 성산업에 종사하고 있다.그러나 이 역시 위안부 문제와는 무관해 보인다.
남중국해 문제(무관심), 동중국해 문제(무관심), 티베트 문제(무관심), 위구르 문제(무관심), 라이다이한 문제(무관심), 파룬궁 문제(무관심), 홍콩 문제(무관심)
이에 대해 한국 정부로서 유감의 뜻조차 표명하지 않는다.쿼드에 대해서는 한 나라를 따돌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며 불참이다.보편적 인권의 문제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위안부문제, 모집공 문제는 단순히 일본 한 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벌어지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즉 그 외에는 관심이 없다.
현대판 위안부 문제 과거의 위안부도 인신매매 사업에 의한 조선인 상인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이권이 지탱하는 끝나지 않는 분쟁
한일문제를 지탱하는 이권
지금도 건재한 인신매매조직
조선시대부터 살아가는 브로커
일제강점기에 따라 신분제도 폐지
지하에 숨어있는 반사회세력의 자금
반일경제 이권과 결부되는 지하자금
끝나지 않는 분쟁이나 다툼이란 경제적 요소가 얽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애초 역사상 전쟁이란 경제 문제가 트리거가 된다.중동 문제는 무엇인가와 이 측면에서 보면, 오랜 대립 구조 속에서 거기에 관련된 비즈니스는 확대되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사회적 발언력을 갖게 된다.그 사람들은 분쟁 상태를 끝내고 싶지 않은 세력이 된다.
한국의 반일운동에 대해서는 반일 이권, 반일경제를 볼 때 어떨까.정치인 좌파언론 대학교수 전교조 조총련 평론가 사회운동가 많은 사람들이 반일 이권으로 수입을 얻고 서로 연결돼 사회적 발언력을 가질 경우 이 흐름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또 하나 한국에서는 지금도 인신매매 브로커가 건재하다.캘리포니아에서는 성에 관련된 산업에서 일하는 외국인 여성의 대부분이 한국인임을 공표하고 있다.
2005년에는 한국 여성 수백 명을 밀입국시켜 미국 캘리포니아주 등 성매매 업자에게 넘긴 한국인 밀입국 알선 조직이 미국 수사당국에 적발된 바 있다.
2008년에는 호주에서 한국계 인신매매 브로커 거대 조직이 적발되기도 했다.일본 내에서도 한국인 유흥업소는 많다.현재 진행형인 위안부 문제다.
이씨 조선시대에는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노비였으며 인신매매 브로커에 의해 매매되었다.그곳은 거대 시장이었고, 인간인 노비와 가축이 교환되고 있었다.이는 이씨 조선시대는 당연한 광경이었고, 정부가 지나치게 늘어난 노비 인구를 줄이는 정책을 취하자 양반들은 이에 저항했다.
일본은 한반도의 신분제도를 폐지했다.브로커의 상품인 노비를 잃어버렸으니 상당히 난처했을 것이다.위안부를 불법 알선한 혐의로 여러 차례 당시 일본 경찰은 인신매매 조선인 사업자를 적발했다.일제강점기에도 노비의 유통이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조직이 현대의 반일운동, 위안부비즈니스와 연결돼 있다면 어떻게 될까.브로커를 통해 거액의 외화를 국내에 끌어들이고 국외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알선을 자금줄로 삼아 위안부상 건립 운동과 반일 선전을 벌인다.
수십 년 전 일본에 화살을 돌리고 난리를 계속 치며 그쪽이 훨씬 나쁘다고 여론을 선동하는 것은 숨은 도롱이도 된다.그리고 반일운동은 이익활동인 측면이 앙앙하고 반일영화, 반일드라마, 반일보도 등 이익을 누리는 틀은 다수 있으며 나아가 지하로부터의 자금흐름은 이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가는 것일까.
전혀 해결 가능성이 없는 다른 나라인 일본을 성토한다고 해도 국내에서 벌어지는 현대판 위안부 문제에는 전혀 사회적 관심이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여성의 권리에 민감한 한국 시민들은 이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다.
전후 배상 노무현 대통령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개인 보상이 포함될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은 노인들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시간벌기라고 하지만 반대겠지.그동안 한국 정부는 국민에 대한 전후 보상을 여러 번 했잖아요.지금의 정부가 도망치고 있을 뿐 일본에 화살을 돌리고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은 문재인이다.
2005년 당시 위안부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일본은 정부 주도의 강제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2015년 위안부 합의에 따라 포괄적으로 끝났음은 물론이다.
-----
2004년 2월 서울행정법원이 한일청구권협정 관련 문서 57권 중 5권을 공개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일본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단체가 2002년 9월 정부를 상대로 한 한일협정의 구체적인 내용 확인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재판이었다.
이로써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과 70년대 보상 이후 일시적으로 수면 아래 취했던 일본의 배상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일종의 2라운드다.
당시 정부는 양국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근거로 항소했다.그러나 2004년 8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협의해 문서 공개를 검토하라고 전격 지시하면서 항소를 포기하면서 공개가 확정됐다.
2005년 1월 청구권협정 관련 문건이 공개되자 일본으로부터 받은 보상금에 비해 1975년 정부가 지급한 피해자 보상액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여론이 비등했다.박정희 정부는 19751977년 보수 당시 3억달러 중 90%를 경제개발 등에 투입했고 10%만이 보상금으로 지급했다.103만명으로 추산되는 강제동원 희생자 중 고작 8,552명만이 이익을 봤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는 이에 대한 후속 조치를 준비했다.당시 노 전 대통령과 이해찬 국무총리는 (1) 법적 보상이 아닌 다른 형태의 지원이 바람직하다(2) 지원 규모는 국민적 타협 협의 과정을 거치는 것(3) 국가는 여유 차원의 보상 지원을 하는 것(4) 국회에서 관련 특별법 제정 등 4가지 기준을 마련했다.이를 위해 조직된 기구가 민관공동위원회이다.양삼성 법무법인 화우 고문 등 민간위원 10명 이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관계자 11명 등 총 21명으로 구성됐다.
민·관 공동위원회는 2005년 8월 26일 다음과 같은 논의 결과를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1)일본군 위안부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와 사할린 동포, 원폭피해자는 한일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2)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차관 3억달러는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 등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반영된다.
(3)한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수령한 무상자금의 상당량을 강제동원 피해자 구제에 사용해야 하는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다(한국 정부는 1961년 6차 회담에서 일본에 요구한 총 12억2000만달러 중 강제동원 피해보상에 대해 3억6000만달러를 산정한 것).
(4)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에 대해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등의 계속적인 책임 추궁을 하는 한편, 국제기구를 통해서 계속 제기한다.
강제성 문자를 기재하지 않은 위안부 합의 한일 양국 정부는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는 정치가 역사를 인정하거나 평가하는 일은 없다.정치인에게 그런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굳이 역사에 포함되는 것으로 정부기관에 보존된 과거 자료는 사실 확인 후 국회에서도 채용된다.
요시다 증언으로 시작해 고노 담화에 대해서는 강제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었다.고노 담화의 가장 중대한 결함은 정부 각료로서 과거의 자료에 근거하지 않고 담화를 발했다.즉 자의적으로 역사를 인정한 것이다.
아베 정권하에서 위안부 모집에 대해 강제성을 나타내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2007년 각의 결정했다.이는 고노 담화를 파기하지 않고 담화보다 상위 각의 결정에 따라 일부 수정을 한 셈이다.
아베 전 총리는 강제 연행은 없었다고 표현하지 않았다.증거가 없었다는 것뿐이다.
2015년 위안부합의에는 강제성 문자가 기재되지 않았다.한일문제 중에서 이 강제성이라는 부분은 가장 핵심적인 문제임에도 말이다.
일본 측은 각의 결정을 답습해 회담에 나섰고, 한국 측도 강제성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이 문구를 생략하기로 합의했다는 얘기다.
위안부합의의 중요한 부분은 이 문제가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해결이라는 부분보다 강제성을 양국이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강제성을 확인할 수 없다면 위안부 문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문제라는 것이다.
강제성을 나타내는 증거에 대해 한일 양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위안부문제 자체가 무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위안부 알선업자(인신매매 브로커)가 위안부 모집을 하여 사업을 하고 있었다.
1933년 6월 30일에는 소녀를 길거리에서 유괴해 중국에 매각 한 한반도 남성(당시 35세)과는 별도로 남편과 자녀를 둔 여성(당시 41세)이 체포됐다.납치된 소녀 중 한 명은 강빈혜(당시 35세)라는 남성에게 20원에 팔린 뒤 살해됐다.
1933년 4월 5일 한남이라는 가명으로 영업한 한반도인 알선업자 오조웅 이익이 경상남도에서 16세 소녀를 350엔에 사들여 넣고 호적을 위조하여 영업허가를 얻으려다 체포되었다.
귀부인을 가장한 여성 알선업자 김복순이 검거됐다.범인 김복순 씨는 정부 이진옥 등 4명의 남녀 그룹을 주도해 1935년 12월 31일 대구역에서 소녀를 납치하는 등 소녀 28명을 한반도에서 납치 했다.김복순은 소녀들을 경선 주성옥에게 매각하고 15엔에서 150엔의 알선료를 받았다.
양가 딸 유괴사건 : 1938년 11월 15일 군산시 개복마을 소개업자 전두환(당시 58세)이 부산에서 19세와 17세 여성에게 만주 취업을 알선해 주겠다며 유희에게 매각할 위임장을 작성했다가 체포 되었다.
하윤명 사건: 경성에서도 상당한 자산가다.자장자장녀가 있으니 네 딸이 어떻겠느냐며 교묘하게 부모를 설득해 선금으로 10엔을 내고 그 집 딸(당시 18세)을 인수했다.그 후 딸을 경성이 아닌 중화민국 톈진으로 데려가 1000엔에 팔았다 .
1939년 3월 28일 아사히신문 남성판은 경성부 노무현산의 김어만 등 일가족 5명을 검거했다고 보도했다.김오만 가족은 1935년경부터 한반도 전역에서 각지의 농촌에서 양녀로 일하고 있다며 만주 방면에서 여성을 인신매매했다. 피해자는 100명에 달했다 .
담장언 사건: 하윤명 부부에 이어 체포된 담장언은 1935년부터 1939년까지 100여 명의 농촌 여성을 북지와 만주에 매각 한 적이 있다.또 하급공무원이 호적위조에 협조한 사실도 드러났다.
일본정부의 대응으로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성매매 알선업자 단속이 강화되고 알선업자 단속에 대한 주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최명호 사건: 1939년 5월 13일 오사카 아사히 신문 중 한반도판은 소녀의 증언을 보도했다.최명호라는 하녀를 비롯한 하녀로 고용되어 최명호는 경성 내 백화점 가이드, 간호사, 여사무원 등 16명의 창업 종사자가 되었다.소녀는 이 같은 업무연락처에서 염증을 느껴 도망치려다 최명호 일당에게 발견돼 납치됐다.그 후 감금되어 주야로 발로 차여 괴로워했다 .
부산 처녀 무역 사건: 1939년 8월 처녀 무역을 하던 유인마가 체포되었다.부산의 알선업자 45명이 100명 이상의 여성을 납치 했다고 1939년 8월 31일 동아일보가 보도하였다.기업들은 만주는 경기가 좋다고 교묘하게 얼버무렸다.
부산공인·공문서위조 이벤트 사기 유괴사건: 1939년 11월 21일 아사히신문 남선판에 따르면 전 부산부 임시종업원 김동윤 등이 관인위조, 공문서위조를 통해 부녀자를 유괴 하였다고 보도하였다.피해자는 28명에 달했고, 이 중에는 남양 방면으로 유괴된 여성도 다수 있었다.
위안부 문제가 뭘까요?한반도에서는 인신매매가 빈번했고, 그것들을 담당했던 것도 당시 한반도인이었습니다.이것들을 일본 경찰이 단속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