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계속하는 유대인 코스프레. 모든 한일관계는 여기에 귀착한다.
2022-01-24
카테고리:위안부문제
Photo by Air and Space Museum (licensed under CC BY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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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원점은 유대인 코스프레
위안부문제, 징용공 문제와는 각각 별개의 문제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애초에 뭐냐 하면 한국이 전후로 계속하고 있는 유대인 코스프레 에서 나온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욱일기 문제도 관련된다.한국은 독일을 본받으라고 일본에 대해 구설수설한다. 그 이유는 독일은 전후배상을 하고 있고 일본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배상이 끝난 일본
많은 한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일본은 서양식민지로 여겨졌던 나라들을 침략하고 그 나라들에게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있다는 것이다.중국은 배상을 포기했다.한국은 적국이 아니었던 것이나 전쟁피해가 없었던 때문에 배상금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유대인 이외에는 포괄배상만
유대인 코스프레가 뭐냐면 우리는 유대인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왜 유대인은 구제되고 우리는 구제가 없다는 것이다.
독일은 배상을 실시하고 있다고 하지만, 독일은 유대인에 대한 배상금 이외에는 각국에 대해서는 포괄적 배상 를 실시했을 뿐이다.이것도 한국인 대부분은 전혀 모른다.
헌법 전문에까지 적혀 있는 현실
독일이 유대인을 상대로 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배상하라는 논리임을 알 수 있다.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서문에는 분명히 #ylow #동양의 토이츠 #/ylow #라고? 어떤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이라고 쓰여 있고, 현 한국 헌법 전문에서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쓰여 있다.현재에 이르기까지 나치=일본의 방정식이다.그래서 하켄크로이츠=욱일기가 되는 것이다.
학살당한 민족과 발전한 민족
확실히 역사적 사실로서 알아야 할 점은 유대인 학살이란 유럽이라는 광대한 지역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소멸시키는 작전이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학살을 벌였다고 주장하지만 인구 증가가 두드러졌다.GHQ 통치하에서도 일본의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내용은 없었다고 미국은 결론짓고 있다.한국은 강제수용소 등이 있다면 당장 보여주면 되는데 학살을 뒷받침할 증거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어느 나라가 다른 민족을 학살하고 소멸시키려 하는데 그 민족에 대해 교육 의료 인프라 기타 여러 가지를 줄 것인가.
국제적 전후처리는 이미 결정
맥아더의 전후 처리 방침은 신속하게 국제군사법정을 열어 전범자를 처분하는 것, 미국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 일본을 신속하게 국제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이다.미국은 전범을 찾고 있었다.한반도는 아니었다고 결론짓는다.
아울러 읽고 싶다
러스크 서한이 보내져 다케시마를 일본령으로 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 - 강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한국
다케시마의 영유를 강화회의에 호소하려던 한국
발행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2조
한국의 요구를 물리친 러스크 서한
일본의 영토 영해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 결정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한 나라의 국경을 정한 예는 없다
1951년 7월 19일 You Chan Yang 주미 한국대사가 다레스를 방문하여 한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Dean G. Acheson 국무장관 앞으로 문서를 전달하였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2조 (a)에 대한 수정 요청으로 조선과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 및 파란도 를 포함한 일제의 병합 전 조선의 일부인 섬들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1945년 8월 9일 포기했음을 확인한다는 내용이었다.
(a)일본국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실제 강화조약 조문에서는 독도, 파란섬 문구는 삭제 되게 됐다는 것이다.
러스크 국무부 차관보는 서한을 보내 미국 정부는 유감스럽게도 해당 제안과 관련된 수정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합중국 정부는 1945년 8월 9일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이 동 선언에서 취급된 지역에 대한 일본의 정식 내지 최종적인 주권 포기를 구성한다는 이론을 조약이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도또는 다케시마 내지 리앙쿠르 바위로 알려진 섬에 관해서는, 이 통상 무인인 이와시마는, 우리의 정보에 의하면 조선의 일부로서 취급된 적이 결코 없고 , 1905년경부터 일본의 시마네현 오키지청의 관할하에 에 있습니다.이 섬은 과거 조선에 의해 영토 주장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라고 회답했다.
한국의 집요한 요구에 대해 미국은 최종 답변으로 한국의 다케시마 영유권을 부정했습니다.마찬가지로 영유권을 주장한 파란섬에 이르러서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섬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는 52개국이 참가하여 일본이 주권을 포기할 것, 포기하지 않을 것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과 전후 보상 문제의 해결을 바탕으로 일본이 국제사회에 복귀한 회의가 된다.
참고로 52개국 중 49개국이 조인 했다.조인하지 않은 3개국은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로 중국이 참여를 하지 않은 점에서 무효라는 이유다.
한국은 다케시마를 국제법상 한국 땅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국제법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각국은 많든 적든 영토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런 큰 국제회의에서 각국이 조인해 영토를 확정한 국제회의는 없을 것입니다.
국제법상으로나 역사적으로 다케시마가 일본인 것은 분명합니다.한국의 주장은 전혀 근거에 근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본과 독일은 다른 나라
분명히 말하면 일본과 나치, 한국인과 유대인은 전혀 다르다.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전혀 다른 역사가 존재한다.한국인과 유대인이 같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인을 유대인으로 대체함으로써 일본 전쟁 피해국의 좌석을 차지하고 전승국 진영의 좌석 에 앉으려 한 것이 분명할 것이다.
헌법 9조를 개정하면 전쟁이 된다?
모레이와 신선조 당수 등이 좋고 일본은 유엔의 감시대상국이기 때문에 선전포고 없이 상임이사국은 일본과 전쟁을 할 수 있다.그래서 헌법 9조 개정 등을 하면 위험하다고 국민을 위협하는 듯한 발언을 자주 듣는다.
동독에서는 1956년 국가인민군이 편성돼 재무비를 실시하고 있다.서독은 1955년이다.이를 보고 상임이사국들이 독일의 재무비는 괘씸하고 전쟁이라는 것이 됐을까.
POINT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참석을 요청하여 미국으로부터 거부당하고 있습니다.이 때에 다케시마 영유권을 국제사회에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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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이용수씨(전 위안부) 증언은 모순투성이 - 이를 국제문제로 삼는 한국시민단체의 윤리 비약.
엎치락뒤치락하는 전 위안부의 증언
내용이 바뀐다 이용수의 증언
미국에서도 증언대에 선 이용수
여러 차례 검거된 인신매매 브로커
35년은 사회의 변혁에는 너무 짧다
아래에 게재하는 것은, 한국의 전 위안부로서의 중심 인물이자 활동가인 이용수씨의 증언의 변천이다.위안부는 윤락녀라고 강연한 연세대 유 교수가 정의연(위안부단체)으로부터 피소된 재판에서 유 교수 측은 이용수 증언의 모호성을 지적하며 증인으로 출석을 요청하고 있다.
증언의 신빙성은 고사하고 정의연도 본인인 이용수씨도 그녀가 위안부였다는 증거조차 제시하지 못했다.서두 이미지에 나와 있는 대로 위안부는 신문 공모에 의해 모집되었고, 당시 화폐 가치로 파격적인 급금이 지불되었다.
이용수의 증언
1992년 증언 저는 그때 16살인데, 벌거벗은 것과 같아서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원피스 한 벌과 신발 한 켤레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걸 줄 테니까 가자고 해서 젊은 마음에 얼마나 잘 비쳤을까. 그때는 그런 것도 모르고 좋다고 생각하고 따라갔어요.1993년 증언 내 동갑내기 친구 중에 김분순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그 집에 놀러 가자 그 어머니가 "네 신발 하나 제대로 못 신어서 이게 무슨 애냐.너는 우리 붕순이랑 저기로 가. 거기 가면 깨랑 게 다 있는 거야. 밥도 많이 먹을 것이고 당신 집도 잘 살게 해 준다고 말했다. 2004년 증언 대구 고성동에서 16세까지 살다가 1943년 어느 여름 16세 때 코와 입만 보이는 모자를 쓴 일본군 관계자가 동네 언니 4명과 함께 우리를 강제로 데려갔다.어디로 가는지 왜 데려가는지도 몰랐어.창문이 없는 기차에 우리를 태웠는데 안 간다고 하니 조선 사람이라며 신발로 밟아 때렸다.집에 간다고 하니까 또 때리더라. 너무 많이 맞아서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2006년 증언 15세이던 1942년경 집에서 잠을 자다가 일본군에 의해 대만으로 끌려갔다.2014년 7월 증언 열다섯 살 되던 해 어느 날 일본 군인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무서워서 도망쳤지만 또 다른 일본군에게 붙잡혀 기차를 타고 대만의 한 일본군 부대로 끌려갔다.2014년 9월 증언 16세에 원피스와 빨간 가죽 구두를 보여주며 배불리 먹여주고 집도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일본 남성의 말에 속아 친구들과 함께 따라나섰다. 중국을 거쳐 대만 위안소로 강제 동원됐다. 위안소의 주인이었다. 이 주인에게 전기고문도 당했다.2017년 증언 15살에 집에서 자고 있다가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다.
이용수씨는 미국에서의 위안부 활동에도 참가해, 2007년에 미 하원에서 가결한 「일본 정부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안」채택에 즈음해, 동원에서의 증인으로서 출석해, 증언을 실시하고 있다.위안부 문제는 바로 이용수씨의 증언, 그리고 위안부단체인 정대협(현 정의연)에 의해 인권운동 명목으로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한일병합기) 신문기사에 따르면 조선인 인신매매 브로커가 소녀를 납치해 매각하는 범죄를 일본 경찰이 여러 건 적발했다.인신매매 브로커란 신분제도가 존재하던 조선시대에 노비는 이 인신매매 브로커를 통해 소머리 등과 교환되고 있었다.
한일합방기는 불과 35년 정도이며, 그때까지 500년 이상 지속된 문화풍습이나 사회적 습관이 사라져 없어질 정도의 시간은 물론 아니다.노비제도를 떠받치던 인신매매 브로커도 일을 하지 않으면 수입이 끊기는 것이고, 노비도 호적제도상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같은 처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은 많이 남겨졌을 것으로 생각된다.농촌에서 가난한 가정의 딸들을 속여 사고파는 일은 당시 한반도에서는 빈번했다.
전후 배상 노무현 대통령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개인 보상이 포함될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은 노인들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시간벌기라고 하지만 반대겠지.그동안 한국 정부는 국민에 대한 전후 보상을 여러 번 했잖아요.지금의 정부가 도망치고 있을 뿐 일본에 화살을 돌리고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은 문재인이다.
2005년 당시 위안부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일본은 정부 주도의 강제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2015년 위안부 합의에 따라 포괄적으로 끝났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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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서울행정법원이 한일청구권협정 관련 문서 57권 중 5권을 공개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일본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단체가 2002년 9월 정부를 상대로 한 한일협정의 구체적인 내용 확인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재판이었다.
이로써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과 70년대 보상 이후 일시적으로 수면 아래 취했던 일본의 배상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일종의 2라운드다.
당시 정부는 양국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근거로 항소했다.그러나 2004년 8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협의해 문서 공개를 검토하라고 전격 지시하면서 항소를 포기하면서 공개가 확정됐다.
2005년 1월 청구권협정 관련 문건이 공개되자 일본으로부터 받은 보상금에 비해 1975년 정부가 지급한 피해자 보상액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여론이 비등했다.박정희 정부는 19751977년 보수 당시 3억달러 중 90%를 경제개발 등에 투입했고 10%만이 보상금으로 지급했다.103만명으로 추산되는 강제동원 희생자 중 고작 8,552명만이 이익을 봤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는 이에 대한 후속 조치를 준비했다.당시 노 전 대통령과 이해찬 국무총리는 (1) 법적 보상이 아닌 다른 형태의 지원이 바람직하다(2) 지원 규모는 국민적 타협 협의 과정을 거치는 것(3) 국가는 여유 차원의 보상 지원을 하는 것(4) 국회에서 관련 특별법 제정 등 4가지 기준을 마련했다.이를 위해 조직된 기구가 민관공동위원회이다.양삼성 법무법인 화우 고문 등 민간위원 10명 이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관계자 11명 등 총 21명으로 구성됐다.
민·관 공동위원회는 2005년 8월 26일 다음과 같은 논의 결과를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1)일본군 위안부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와 사할린 동포, 원폭피해자는 한일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2)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차관 3억달러는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 등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반영된다.
(3)한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수령한 무상자금의 상당량을 강제동원 피해자 구제에 사용해야 하는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다(한국 정부는 1961년 6차 회담에서 일본에 요구한 총 12억2000만달러 중 강제동원 피해보상에 대해 3억6000만달러를 산정한 것).
(4)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에 대해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등의 계속적인 책임 추궁을 하는 한편, 국제기구를 통해서 계속 제기한다.
사기 단체 정대협 위안부의 대표적인 인물 이용수는 위안부가 아니었다고 윤미향 의원이 증언했다. 전 정의연 대표 윤미향 의원은 이용수와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1992년 신고전화가 와서 (이용수는) 모기 우는 소리에 떨면서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내 친구 얘기인데 당시 상황을 어제처럼 기억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30여 년을 함께 걸어왔다고 윤미향은 말했다.
이용수는 전직 위안부의 대표적인 인물로 2007년 미국 하원 위안부 결의 때 증언대에 선 것도 이 인물이며, 2017년 트럼프 전 대통령 방한 때 만찬에서 트럼프를 껴안은 노파도 이용수다.위안부안 나왔다니 도대체...
람자이어 교수의 억지 발언 위안부강제연행 증거 없다 새빨간 거짓말 [연합뉴스 기사 번역 발췌]
1월 5일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로 규정해 국제적 반론을 샀던 마크 램자이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이번에는 위안부강제징용 사실을 입증할 동시대 문서가 없다 라고 단언해 파문이 예상된다.
램지어 교수는 5일 하버드대 로스쿨 홈페이지에 올린 논문 태평양전쟁 성적 계약: 비평에 대한 답변에서 이같이 밝혔다.
자신을 향한 그동안의 비판을 재반박하는 형식의 이 논문에서 램자이어 교수는 한국 여성이 자신의 의지에 관계없이 총부리를 두른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들어갔다는 주장에 대해 답한다며 이 주장은 가짜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한국 여성들은 계획적인 일본군의 강요에 의해 강제로 위안소로 징용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일본 저술가이자 활동가인 요시다 키요시가 1983년 펴낸 책 '나의 전쟁범죄'가 위안부 강제징용의 사실상 유일한 근거였다고 주장했다.
종전 후 35년간 (강제징용을 증명하는) 증거는 없었다.1980년대 후반에야 일부 한국 여성이 이를 주장하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 위안부 논의는 요시다의 '사기'로 시작된 "라며 "나를 비판하던 전문가 대부분이 일본·한국 출신인데 이 책에 대해 알면서도 아무도 이 책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제의 논문에 대해 램지어 교수는 논문의 핵심은 위안부여성이 왜 선불로 돈을 받았는지, 계약상 어떤 조건에 따라 여성들의 근로시간이 정해졌는지 등 계약에 관한 것이었다며 하지만 나에게 제기된 비판은 이런 경제분석을 겨냥한 적이 하나도 없었다.
이날 발표한 논문에서 램지어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의 공동저자이자 일본 극우단체의 지원을 받아 논란이 됐던 이우연 낙성대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지난해 연구를 인용했다.
램자이어 교수는 또 전후 상당 기간 침묵하던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에 배상금을 요구하게 된 뒤 말을 바꿨다고도 주장했다.
강제징용을 증명할 문헌이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증거인 피해자들의 증언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
특히 위안부피해자 이용수를 향해서는 (말을 바꾼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악명 높다(notorious)고 했다.
[이상 발췌]
램자이어 교수는 강제 연행을 나타내는 증거나 계약서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일본 정부는 마찬가지로 강제 연행을 나타내는 증거는 확인할 수 없다고 아베 정권하에서 각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위안부 합의의 본 취지는 무엇인가?화해 해결 재단을 한국 측이 설립하는 것이 목적 -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기사는 뭔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하부 게재). 아무래도 2015년 위안부 합의에서 일본이 출연한 10억엔을 전 위안부 측이 받아 거부하자 한국 정부가 10억엔을 출연해 양성평등기금을 설립했다는 얘기인데, 전 위안부 가족회는 이에 대해 설명도 협의도 없었다며 성평등기금 배포도 이뤄지지 않았다 라는 것.
애초 본질적으로 문재인정권도 한국 여론도 빠져 있는 것은 일본 정부가 전직 위안부에 직접 전달되는 10억엔을 출연한 것이 아니다.
한국 정부 측이 전직 위안부 지원을 목적으로 한 재단을 설립하고 그 설립 자금을 출연한 것이다.한국정부의 활동과 설립재단이 전직 위안부측과 주체적으로 화해해결을 하는 중에서 공익재단법인이었기 때문에 이 재단의 활동을 통해 새로운 공익사업이나 기금을 모집하여 해결자금을 늘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 한일이 합의한 것이 위안부 합의가 된다.일본에서 갹출된 10억엔을 전직 위안부 측이 수령을 거부했다는 것 자체가 위안부 합의의 본뜻과 다른 것이다.
문재인은 화해치유재단을 해산시켰고 10억엔은 일본에 갚지 않았으며, 새로 양성평등기금 설립에 10억엔을 쏟아 부었다고 하지만 그것도 의미를 모르겠다.
어쨌든 한국 정부가 주체적으로 문제 해결을 하겠다는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임은 분명하다.
2015년 위안부합의
日本側:
(2)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본 문제에 진지하게 임해 왔는데, 그 경험에 입각하여 이번에 일본 정부의 예산에 의해 모든 전직 위안부 분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를 강구한다.구체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전직 위안부 분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한 재단을 설립하고, 여기에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자금을 일괄적으로 거출하고, 한일 양국 정부가 협력하여 모든 전직 위안부 분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실시하기로 한다.
2. 한국측:
(1)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표명과 이번 발표에 이르기까지의 대응을 평가하고, 일본 정부가 상기 1. (2)에서 표명한 조치가 착실하게 실시된다는 전제 하에, 이번 발표에 의해 일본 정부와 함께 이 문제가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을 확인한다.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실시하는 조치에 협력한다.